‘문학과 사회’ 여름호를 읽다가 윤성학씨의 시 ‘뼈아픈 직립’을 만났다. 직립이 뼈아프게 된 사연을 들어보자. ‘허리뼈 하나가 하중을 비켜섰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다가/ 후두둑/ 직립이 무너져내렸다.’화자는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다 허리뼈 하나가 삐끗 어긋난 듯하다. 다른 척추동물에게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특히 곧추 서서 걷는 인간에게 흔하다.
허리 아래가 상반신의 무게를 늘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류 가운데도 펭귄처럼 곧추 서서 걷는 동물이 있고 일부 유인원들은 직립 흉내를 더러 내기도 하지만, 직립은 주로 인간의 특성이다.
19세기 말 자바에서 화석이 발견된 직립원인(直立猿人ㆍ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은 약 5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형이다.
직립 보행은 앞발을 해방시켜 도구의 사용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문명의 탄생을 촉진했다.
인류의 머나먼 방계 조상이 어느 순간 벌떡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수렵시대에도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공작인(호모 파베르)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는 반드시 직립인(호모 에렉투스) 이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류의 진화에서 직립만큼 획기적인 사건은 드물다. 그런데 화자는 ‘후두둑/ 직립이 무너져내렸다.’ 인간의 특성 하나를 순식간에 잃었다.
‘뼈를 맞췄다/ 삶의 벽돌 한 장쯤은/ 어긋나더라도/ 금세 다시 끼워놓을 수 있는 것이었구나/ 유충처럼 꿈틀대며 왔던 길을/ 바로 서서 걸어 돌아왔다.’
화자는 정형외과나 접골원에 가서 어긋난 뼈를 맞춘 듯하다. 병원으로 갈 때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엉금엉금 걸었겠지만, 일단 뼈를 맞추고 나니 몸이 다시 온전해진 듯해 바로 서서 돌아왔다.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었을지도 모른다. 어긋난 삶의 벽돌을 금세 다시 끼워놓았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온몸이 다 잠들지 못하고/ 밤을 새워 아프다/ 생뼈를 억지로 끼워넣었으니/ 한 조각 뼈를 위하여/ 이백여섯/ 내 삶의 뼈마디 마디가/ 기어코 뼈몸살을 앓아야 했다.’
하등 동물과 달리 인간의 몸의 기능은 종합적이다. 한 군데 탈이 나면 바로 거기만 아픈 것이 아니다.
어긋났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뼈만이 아니라 온 뼈마디 마디가 고통에 동참한다. 그래서 화자는 잠들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이게 다 직립 때문이다. 물론 직립은 인간의 자존을 상징한다. 꼿꼿이 서 있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네발짐승과 구별한다.
그 직립은 진리와 완성의 숫자 1의 직립이고, 생명력 넘치는 나무의 직립이며, 힘차게 발기한 남근의 직립이다.
그러나 직립 때문에 사람은 취약하다. 직립은 문명의 열쇠였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탈력(脫力)의 저주다.
그래서 이 위태위태한 직립은 잠 못 이루는 화자에게 ‘뼈아픈 직립’이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