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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신세대식 태극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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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신세대식 태극기 사랑

입력
2002.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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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반공도덕을 배운 세대라면 교과서에 실렸던 ‘피 묻은 태극기’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분단과 함께 월남했다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참전했던 한 병사의 이야기 말이다. 고향 마을을 수복해 태극기를 휘날리고 싶어하던 병사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죽음을 앞둔 그의 피 묻은 태극기를 맡은 소대장은 1·4 후퇴로 그의 소원을 들어 주지 못하고, 내내 그 태극기를 소중하게 간직한다.

이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과거 우리에게 태극기는 언제나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태극기의 성스러움에 대해 교육 받던 세대에게 요즘 열기를 뿜고 있는 월드컵 길거리 응원의 풍경은 다소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젊은 응원단 수십만명이 모여드는 서울 광화문 일대에는 젊은이들이 대형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거리를 누빈다.

태극기 문양의 옷을 입거나 태극기 문양으로 몸을 장식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나이 든 세대가 외경심을 품고 대하던 태극기를 젊은 세대는 마치 응원도구나 장식품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생경한 모습이다. 무엇이 우리 젊은이에게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

지금의 젊은 세대는 무슨 일을 하든 즐거움을 중시한다. 평소의 생활에서는 물론 사회운동에 참여할 때조차 심각한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당연히 이들에게 태극기가 지니고 있던 과거의 비장함은 별로 호소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태극기에 대한 태도가 바뀐 데는 그 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의 심층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우리나라의 국가 형성이 성숙 단계에 접어든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 상징물에 대한 비장한 태도는 국가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건국을 이룬 사람들에게 국기는 단순한 상징물 이상의 무게를 갖기 마련이다.

건국을 가로막던 세력이 국기의 자유로운 사용조차 억압했다면 국기에 대한 감정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일제의 고통을 겪은 우리 민족에게 태극기는 소중히 모셔 놓고 결의를 다져야 할 대상이었다.

반면 국가형성이 성숙 단계에 접어든 지금 국기는 과거의 비장한 분위기를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

젊은 세대에게 태극기는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러운 만큼이나 어릴 때부터 익히 보아온 일상적인 상징일 뿐이다.

이미 오래 전에 이 단계를 거쳐온 선진국 사람들이 국기를 대하는 방식도 젊은이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들 수 있다. 과거 독재정권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위로부터의 국민통합을 강요했다.

그 수단으로 그들은 권위주의를 채택했다. 국기는 이 권위주의의 주된 상징물 중 하나였다. 매일 되풀이되는 국기 하강식은 일상생활에서 정권의 권위를 재확인시키는 장이기도 했다.

체제에 대한 도전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던 독재정권은 국기의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 역시 철저히 규제했다.

독재정권이 퇴진하면서 사회의 통합은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는 이 자발성이 마음껏 발산되는 것을 본다.

국기를 대하는 과거의 태도가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었다면 거리응원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열기가 수렴되고 있는 장이다.

이 속에서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이용해 자발성을 드러내면서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태극기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한다.

우리 역사에는 혁명적으로 과거의 권위를 해체했던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점진적으로 과거의 권위를 해체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태극기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지만 해체되고 있는 것이 태극기의 권위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정준영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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