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서는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보다는 ‘나는 왜 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쪽이 훨씬 더 가까이 살갗에 와 닿는다.같은 얘기가 아니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만에! 한 마디 말이 지닌 이 뉘앙스의 미세하고도 엄청난 차이야말로 바로 사람살이 속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미묘함이요 풍요(豊饒)일 터이다.
반(半)은 즉답(卽答)이 들어 있는 나의 이 질문 방식에는, 벌써 나에게 있어 문학은 처음부터 ‘운명’이었다는 여운을 강하게 풍긴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문학은 근 50년간 소설을 써온 결론으로서의 미적지근한 표현으로서의 ‘운명’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내 인생의 처음부터 ‘반드시 만나야 할 것’이었다.
내가 직접 겪은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고희를 지난 이 나이로 내 첫 기억에 해당하는 네 살 때 늦가을의 삽화 한 토막이다.
첫 추위가 닥쳐 집안 어른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어 추워, 어 추워’ 하면서 드나들었던 것. 낮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마을의 산천을 비롯한 모든 풍정(風情)들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이상으로 기이할 정도로 또렷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이렇게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날, 오전 11시 께나 되었을까. 내 할아버지의 두 살 아래 동생이시던 종조부께서 들어오셨다. 나보다 두 살 위였던 당신의 여섯 살짜리 친손자(내게는 육촌형)에게 주려는 천자문 한 권을 한 손에 들고 계셨다. 마을 훈장에게 부탁해서 얻어온 것이었다.
그때 어른들끼리 몇 마디 오가는 말을 듣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종조부님을 비롯해 어머니와 누이가 아무리 나를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다른 어른들도 뒤늦게야 나름대로 눈치를 챘다.
나는 불과 네 살 나이에 그 천자문 책을 그토록 탐을 냈던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를 기특하게 여기며 싱글싱글 웃기도 하셨다. 그럴수록 나는 억울해서 더욱 더 포학을 하듯이 울어댔다.
그렇게 달래도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자 엄마는 나를 큰 누나의 등에 업혀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일러서 내보냈다. 그제서야 일단 울음은 그쳤지만, 여전히 이따금씩 혼자 흐느꼈다. 다시 집으로 들어서자 아까 그 생각이 또다시 떠올라 새 울음 속에 휘감겨 들었다.
결국 종조부께서 그 서당 훈장에게 다시 한 번 부탁을 해야 했다. 종조부가 다음날로 새 천자문 한 권을 나에게도 안겨줌으로써 이 일은 매듭지어졌다.
그때로부터 65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의 일은 새삼 기이하게 떠오른다. 그 날의 날씨, 주위 사방 풍정, 어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들. 오직 그날 일만이 이렇게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이 무슨 조화 속일까 싶다.
그렇다! 바로 그날, 내 운명은 문자(文字), 문학(文學), 곧 책(冊)이라는 것과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잠시 그쳤다가도 다시 울먹인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모름지기 책이라는 것이 내 운명과 상관이 된다는 것을 저 어른들은 왜 저렇게도 아직 모르고 있는 걸까 하는 안타까움.
그때 그 주위 어른들이 그렇게도 천치 바보처럼 보이던 그 순간. 내 감각의 핵 부분만은 그 때의 감정을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내가 더 구체적으로 ‘문학’과 만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여섯 살 때 겨울이었다. 1937년 일제 치하였다. 그때 네 살 터울의 작은 누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국어 교과서였는지 수신(요즘으로 친다면 ‘도덕’) 교과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누나는 어느날 자기 교과서의 맨 뒤에 있던 ‘리어 왕’을 읽어주었다. 그만한 아이들을 상대로 2막짜리로 짧게 윤색한 희곡이었다.
그때 겨우 여섯 살짜리였던 내가 처음으로 받았던 그 충격이란! 맨 앞 홀수 면에 셋째 딸 코델리아가 아버지 리어 왕 앞에 꿇어앉아 몇 마디 여쭙던, 세로로 실렸던 장면이며, 그 두 장 너머 2막에서 드디어 리어 왕이 폭우 속의 광야를 헤매던 짝수 면 맨 아래에 가로로 실렸던 장면까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이렇듯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다고 고작 여섯 살짜리가 밤새 골똘하게 생각한들 별 수가 있었을까.
그 뒤로 내가 누나 모르게 그 책의 장면들을 몇백 번 몇천 번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6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두 장면들이 어떤 모습으로 실렸는가 하는 것까지 이렇게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처음으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통해 사람 산다는 것의 영원한 불가해성(不可解性)이라는 것을 접했다.
지금까지도 내심 무척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문학이라는 것과 처음으로 만난 매개가 셰익스피어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그 무슨 긍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디에선가 읽은 것이 생각난다. 어릴 때 첫 충격을 받았던 문학 작품이 어떤 작가가 쓴 것인지 또 그 받은 충격의 농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따라, 그가 뒤에 어떤 성격과 위상(位相)의 작가까지 될 것이냐 하는 판가름이 난다고 했다.
이 경우가 그대로 합당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섯 살 때 작은 누나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여간 요행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이라는 것, 또 어렸지만 밤새 골몰할 만큼 충격이 컸다는 것은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나를 규정짓는 것이었다.
이 첫 기회를 주었던 작은 누님에게도 거듭 감사하고 싶어지지만, 아아, 그동안 북에서 살았던 누님은 이미 1960년대에 저 세상으로 가신 뒤였다.
작은 누님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바로 그 ‘리어 왕’이었다. 나에게 문학을 처음 접하게 했던 그 누님이었는데, 하고.
이 두 가지 삽화는 내가 왜 50년 동안 소설을 써 왔는지, 왜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몇 마디 첨언(添言)이 남아 있다. 한 작가가 써내는 작품의 총량은 궁극적으로는 그 작가가 살아낸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직접적이냐 우회적이냐 상징적이냐 하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삶과 작품의 총량을 등가로 놓는 것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을 것이다.
나는 1950년 12월, 만18세에 혼자 몸으로 월남하여 이 남쪽 세상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인생 그 자체로서는 드센 팔자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이 한편으로는 이렇게 꾸준하게 소설을 쓰게 한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은 남북 이산의 아픔과 고향 산천에의 짙은 그리움에서 단 하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50년 간 소설을 써오는 나에게 있어서는 쓸거리, 그러니까 소재의 ‘샘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던 것이다. 한 작가로서 이 이상의 축복도 없지 않을까.
1999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정말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남쪽은 너무 방탕해서 문제인데, 북한은 참고 줄이다 못해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경지까지 가버렸다. 분단된 지 50년 만에 남북이 아주 다른 세상처럼 돼버린 것이다.
나는 남북간의 문제를 푸는 것이 문학과 문학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통일 이야기를 하면서 쓸데없이 소월의 시를 읊느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결국 우리가 이르게 되는 곳은 같은 산천에 살아온 같은 핏줄인 민족의 아픔이다.
아픈 만큼 상대의 형편을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는 것. 상대방에 대한 그러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문학의 언어는 은유(隱喩)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에게는 매사를 윽박지르는 식의 단정(斷定)에 대해서는 생득적으로 튕겨내려는 거부감이 있다.
문학은 매사가 명명백백하게 가려지기보다는, 슬그머니 넌지시 비쳐주는 쪽이 더 위쪽에 자리한다. 그 속에서만 사람들의 상상력을 따뜻하게 자극하는 질박(質朴)한 것이 생겨난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암시와 은유를 통해, 언어라는 마술을 통해 감동을 받는 것이다.
나는 1920년 12월,만18세에 혼자 몸으로 월남하여이 남쪽 세상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겪으면서 살아왔다.인생 그 자체로서는 드센 팔자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그러나 그 삶이 한편으로는 이렇게 꾸준하게 소설을 쓰게한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내 삶은 남북 이산의 아픔과 고향 산천에의 짙은 그리움에서 단 하루도 벗어날수가 없었다.
그렇게 50년 간 소설을 써오는 나에게 있어서는 쓸거리,그러니까 소재의 '샘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던 것이다.한 작가로서 이 이상의 축복도 없지 않을까.
그리하여 올해 초에 미국 UCLA에서 '1960년대 한국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8월부터 일리노이주립대 조교수로강단에 서게 될 테오도르 허그스라는 미국인이 몇 년전에 내 단편집을 번역하고 싶다며 한국 문학번역원에 신청서를 제출했다.그의 신청 내용은 내가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쏙 들어맞아 인용한다.
"남북 분단문제에 초점을 맞춘 이호철 단편집을 번역하기 위해 지원을 요청합니다…문학사적으로 이호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단편들을 통해서 이호철의 40여 년 문학 활동을 해외에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분단 시대에 이호철만큼 남북 분단 문제를 꾸준하게 다루는 작가도 없을 것입니다.한국의 분단 문제는 매우 시급한 것이지만,현재 미국에서는 분단 문제에 대한 인식이 그리 깊지 않습니다.따라서 이 단편집을 통해 미국 독자들이 우수한 문학작품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북 문제에 대한 이해도 커질것입니다."
●연보
▲1932년 함남 원삼 출생
▲1950년 원산고 졸업·월남
▲1955냔 '문학예술'에 단편 '탈향'과 '나상'추천 등단
▲1991년 예술원 회원
▲단편집 '나상''이단자''문''이산타령 친족타령' 장편소설 '소시민''서울은 만원이다''남녘사람 북녘사람''개화와 척사'등
▲현대문학상(1961) 동인문학상(1962)
대한민국문학상(1989)대산문학상(1996)대한민국예술원상(1998)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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