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신문은 한국이 대 폴란드 전에서 1승을 거둔 뒤, 한국이 48년간 15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드디어 아시아 팀으로는 처음으로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고 썼다.서방의 한 신문도 한국 축구 팀의 전력 향상을 격찬하면서 한국이 이제 월드컵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 언론들은 또 응원에 나타난 한국인의 축구 열정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미국 팀 코치는 이를 두고 한국과의 경기는 단순한 선수간의 경기를 넘어 한국과의 싸움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특히 붉은 악마들의 열광적 응원과 질서 정연함의 조화된 응원문화를 대체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후 2명의 사상자와 80여명의 부상자를 낸 모스크바 난동과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런 관찰을 통해 한국은 전반적으로 좋은 대외적 이미지를 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것은 축구 열기 속에 나타난 강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인 것 같다.
이미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전 국민이 금 모으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이번 축구 열기 또한 정해진 목표를 향해 쉽게 단합하는 강도 높은 민족주의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다만 이번의 경우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방어적이라기보다 개방적이고 열린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구한말 이래 일제, 미군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외부 세력의 압력에 대항하는 데 익숙했고 이는 생존을 위한 방어적 성격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대응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월드컵 축구 행사는 이와 달리 우리 주최 하에 우리 실력으로 세계 유수 팀과 능동적으로 경쟁하면서 우리의 역량을 보여주는 드문 기회다.
월드컵의 1승과 이어지는 승리는 단순히 축구의 한을 푸는 차원을 넘어, 경제발전·민주화를 바탕으로 서구에 대한 역사적 열등감을 극복하는 의미를 갖는다. 방어적 민족주의에서 열린 민족주의로의 이행인 것이다.
열린 민족주의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히딩크 현상’이다. 5년 전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서구 제도가 일방적으로 수입되었다면 히딩크의 경우는 능동적 영입을 통해 우리의 한을 풀어보려는 동ㆍ서양 접합의 상징이다.
히딩크 현상에서 열린 민족주의 가능성을 보는 것은 단순한 동ㆍ서양의 만남을 넘어 그가 이루어 낸 한국의 전통과 서구 가치의 조화다.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지적했듯이 히딩크는 집단주의로 쌓인 한국 팀에 개인주의를 접목시키는 데 성공했다.
히딩크 신드롬의 부분적 활용 가능성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의 구조적 문제인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균형이다.
붉은 악마의 함성이 상징하는 경기장 스탠드의 집단주의가 개인주의와 접합된 히딩크 전략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날 한국의 제도적 아이러니가 아닐까?
강한 대외적 집단주의가 한국의 원동력이고 이의 중요성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다만 집단적 힘이 진정한 열린 민족주의로 나가는 길은 단순한 대외적 단결력의 표출을 벗어나 국내적으로 개인주의와의 적절한 조화를 이뤄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 축구 대회가 단순히 우리의 우월의식을 표출하거나 과거 열패의식의 지속으로 그치지 않고 균형된 열린 민족주의로 가는 시발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오늘자부터 한달에 한차례'하용출 교수의 국제 조류'를 싣습니다.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로 이 대학 국제문제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는 필자는 국제적 이슈와 흐름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신선하고 명쾌한 지침을제시할 것입니다.
▽약력
▲충남 공주·52 ▲서울대 외교학과 ▲미 켄트 주립대 석사,UC버클리대 박사(국제정치학)▲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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