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영원한 제국’인 줄 알았던 프랑스가 장엄하게 무너지던 그날, 아쉽고 허탈한 마음으로 지단과 바르테즈가 프랑스 응원석 앞에서 감사의 인사를 하는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계 최강 프랑스가 1차 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 사실을.그날 프랑스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프랑스가 16강에 진출하기 위한 조건은 두 골 차 이상의 승리. 그러나 덴마크가 상대일 경우 그건 기적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동안 부상 때문에 뛰지 못했던 ‘예술 축구의 지휘자’ 지네딘 지단은 허벅지에 압박 붕대를 한 모습으로 나왔다. 그는 과연 기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경기가 시작되자 숨막힐 듯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프랑스가 경기를 지배했지만 덴마크의 저항은 완강했다. 전반 17분 프랑스에게 완전한 기회가 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일까? 트레제게의 왼발 슛이 골키퍼에게 걸렸다. 겨우 5분이 지난 뒤 프랑스에게 재앙이 찾아왔다. 덴마크의 로메달이 프랑스 수비 뒤로 파고들어 하프 발리 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세 골을 넣어야 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프랑스는 드사이의 헤딩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나온 것을 시작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런 경기에서 프랑스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만큼 일방적인 경기였다. 지단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패스나 현란한 개인기는 '예술 축구'의 여러 단면을 보여줬다. 그러나 굳게 닫힌 덴마크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후반 21분 단 한번의 역습으로 덴마크의 토마손이 추가 골을 터뜨려 2대 0이 되었다. 프랑스에겐 절망적인 상황이 됐다. 후반 28분 트레제게가 다시 한번 번뜩였다. 그러나 수많은 관중들이 “골~~!!”을 외치는 순간 트레제게의 슈팅은 크로스바를 맞고 바로 밑으로 떨어졌다. 무슨 악령이 씌운 것 같았다. 지단도 이젠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뒤로도 프랑스는 줄기차게 덴마크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제국은 무너졌다. 어떤 사람들은 ‘1차 라운드 탈락’이라는 참담한 결과만 놓고 ‘예술 축구가 몰락한 이유’를 분석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이 그저 불운했을 뿐이다.
문득 에메 자케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12㎝ 위로 뜨면 아웃이고, 12㎝ 밑으로 가면 골이다. 승리와 패배의 차이는 그것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승부의 신’ 앞에서 겸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등과학원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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