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4일 한국 축구 ‘부산대첩’ 같은 감동이 한국인에게 또 있을까.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광복의 날, 독재 정권을 무너트린 1960년 4ㆍ19 학생혁명의 날에 비견하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신분과 계층, 출신지와 세대를 아울러 온 한국인을 감격의 용광로 속에 몰아넣은 쾌거는 우리 기억 속에 그리 흔하지 않다.
일주일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 축구 화제의 한가운데 거스 히딩크 감독이 있다. 골 넣은 선수들보다 외국인 감독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한국인 입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용병의 달인이니, 훈련과 작전의 귀재니 하는 찬사가 신문 잡지 제목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원칙에 철저한 선수 기용과 약속을 중시하는 성실성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는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했다. 자신이 요구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도달한 선수가 아니면 아무리 유명해도 쓰지 않았다.
우선 전후반을 풀로 뛸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기술을 요구하고, 기초훈련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 몸을 던진 성실성이었다.
대 폴란드 전 엔트리를 보고 축구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은 생소한 이름이 많은 데 놀랐다.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빠진 탓이었다.
히딩크 이전의 대표팀 선발과 기용에는 감독과의 연고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 축구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축구계의 오랜 병폐였던 학연과 지연 문제였다.
축구 명문고와 대학 출신들을 안배한 위에 지연까지 작용했고, 교제에 능한 선수들도 끼어 들었다.
이런 불공정한 인사에 반발한 선수들이 이길 게임을 일부러 져버렸다는 풍문이 심심찮게 나돌 정도였다. 자격이 없는 선수 기용이 팀 전체의 정신력을 떨어트린 것이다.
히딩크 축구의 두 번째 비밀은 감독 자신의 성실성이다. 그에게는 한 때‘오대영 감독’이란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있었다.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선 컵 축구대회에서 프랑스에게 5대 0, 그 해 8월 유럽 전지훈련에서 체코에게 또 5대 0으로 패하고 얻은 별명이다.
휴가를 자주 간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해외 원정경기에 여자친구를 동반한 것이 구설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2002년 6월에 대비한 중ㆍ단기 훈련계획을 묵묵히 시행해 나갈 뿐이었다.
다른 분야도 히딩크 식 원칙주의가 자리 잡혔다면 우리는 선진국 문턱을 바라보며 이렇게 오래 질척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정치에서 지연과 학연이 추방됐다면, 이름도 가물가물해진 무슨 무슨 게이트 같은 비리 부패극이 발 붙일 틈이 없었을 것 아닌가.
이틀 남은 지방선거가 이토록 푸대접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정부나 지방 자치단체, 공기업이나 기관 단체, 심지어 사조직에도 히딩크 원칙이 지배한다면 시기심과 패배주의로 인한 갈등과 비효율은 없을 것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말에서부터 동상을 세우자, 부산구장 이름을 히딩크 구장으로 바꾸자, 한국인으로 귀화 시키자는 등, 끝 없는 히딩크 예찬론에는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인들까지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정말 듣기 역겨운 공해다. 대선 후보들이나 정당 대표들이 저마다 우리 정치의 히딩크가 되겠다고 외친다.
자치 단체장은 물론 기초의원 후보들도 제각각 ‘우리 고장의 히딩크’가 되겠단다. 그러나 그 한마디를 빼고 나머지는 지연과 학연을 자극하는 말의 홍수다.
남을 헐뜯고 자기만 잘났다는 말들 뿐이다. 히딩크의 성공을 보고도 그 요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다.
문창재 논설위원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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