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전달매체로서 아직까지는 종이에 인쇄한 책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책이 언제까지 살아 남아 있을까하는 의문이 근자에 들어 제기되고 있다.인쇄된 많은 서적이나 신문 등이 전자 형태로 바뀌어 웹이나 CD롬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도 많다.
우선 부피가 훨씬 적어졌다. 필자가 주로 이용하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18세기에 중국 고대로부터 당시까지 전해오던 거의 모든 서적을 필사하여 집대성한 문헌이다.
이 사고전서를 대만에서 80년대에 축소, 영인하여 내놓았는데, 수 백 페이지짜리 책으로 모두 1,500권에 달한다.
구입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그 책들을 모셔놓으려면 교실 크기의 방 하나는 족히 필요하다. 또한 국내에 소장하고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고전서가 몇 해 전 중국에서 CD롬 100장으로 출시되었다.
아직은 스캐닝 작업으로 만든 것이라 검색도 안 되고, 중국어 윈도를 별도로 설치해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래도 도서관을 기웃거리는 것보다 몇 배의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조선왕조실록의 CD롬은 한글로 번역 된데다 주제어 검색까지 가능해 그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전자매체의 자료를 인쇄해서 읽는다. 활자매체가 훨씬 친숙하기 때문이다.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 고대 중국에서는 간독(簡牘)에 글자를 기록하였다.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과 나무조각으로 만든 목독(木牘)을 의미하는 간독은 하나의 크기가 보통 세로 23㎝, 가로1㎝, 두께 0.2∼0.3㎝로 30~40자 정도를 써 넣을 수 있었다.
이것을 굴비두름 엮듯이 묶어 사용하였으니 그 불편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비단에 글을 쓰기도 했지만 값이 너무 비싸 실용적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 때 종이가 나오면서 책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요즈음 식으로 베스트셀러가 나올라치면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종이는 간독을 능가한 정보전달 매체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혁명적 요인은 인쇄기술의 발전이었다.
인쇄가 일반화했던 송대에는 대량전달수단의 발전으로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계층이 확대되고, 사대부 주도의 '중국 문화 르네상스'가 열렸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견해는 당시의 대학자요 명신이었던 구양수(歐陽脩)가 검증되지 않은 인쇄물이 쏟아지는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질이 낮은 정보가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과, 노력 없이 얻은 지식의 깊이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다.
70년대에 대학에 다녔던 필자는 마침 복사기가 나와 있어서 필요한 자료는 복사해서 볼 수 있었다. 필자보다 앞선 세대의 교수님들은 도서관에서 손으로 일일이 베껴와야 했다고 한다.
복사기의 효능은 또 시험준비를 위해 잘 정리된 모범생의 노트를 베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만 해도 남의 보고서 숙제를 슬쩍 하는 학생도 적어도 베끼는 수고는 치뤄야 했다.
하지만 컴퓨터의 보급으로 숙제를 슬쩍 하는 요즈음 대학생들 중에는 베끼는 수고조차 안 하고 앞뒤의 몇 부분만 바꾸어 버젓이 내는 친구들도 있다.
그 뿐이랴. 웹상에 떠다니는 정보들을 몇 조각 짜맞추어 자기의 글인 양 제출한다.
그것이 자기의 지식이 될 리 만무한데도. 요즈음 학생들은 한자는 물론이고 한글을 쓰는 것도 귀찮아 하는 것 같다.
컴퓨터는 진정 발전된 문명의 이기임에 분명하다. 아날로그 세대이면서 디지털 세대에 겨우 턱걸이하며 사는 필자와 같은 세대는 아직도 컴퓨터가 무섭고 미울 때도 있지만,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걱정은 쉽게 얻는 지식에 대해 그 귀중함을 인식 못하거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이 천년 전 송대 학자 구양수의 우려처럼 기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박지훈 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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