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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후의 여성탐구] 연기자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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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후의 여성탐구] 연기자 김혜자

입력
2002.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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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홍보대사로 인도에 갔을 때다. 둘째 딸은 독초를 먹인다는 아픈 얘기를 듣는다. 두 명, 세 명 그리고 네 명을 그렇게 했다는 젊은 엄마들. 천연덕스럽게 그 말을 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어떻게 그 어린 생명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아이들이 가여워서 한없이 운다. 삶 그리고 죽음을 그렇게 쉽게 규정할 순 없다.

동창들이 그녀가 어렸을 때 보여주었던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남의 일 같다. 기억이 없다. 늘 방에 열쇠를 채우고 혼자 있던 아이.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한 아이. 영화를 좋아했다. 슬프고도 애절한 시 그리고 혼자 그림을 그리던 미술실의 풍경. 그리고 막연히 19살에 죽을 거라는 느낌. 19세는 29세가 되고 39세가 된다.

어쩌면 타고날 때부터 인생의 덧없음을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현실은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다. 29세때 서울대를 졸업한 남동생을 잃는다.

그날 이후 한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내면적인 고통과 불안을 남에게 얘기해 본 적이 없다.

인도 갠지스강에는 매일 의식이 벌어진다. 한쪽에서는 장례가, 다른 쪽에서는 시집가는 신부의 행렬이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갓 태어난 아이의 머리카락이 태워진다.

인도에는 생과 사가 공존한다. 가난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구질구질하지도 않다. 그곳은 깊음이 있다. 그곳에 네 번 갔다 왔다. 죽으면 자신도 화장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병이 나도 치료할 생각이 없다.

월드비전 홍보대사를 맡은 것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한국전쟁 고아를 위해 탄생한 단체다. 이제 우리가 다른 나라 굶주린 아이들을 도와주게 되었다. 10년 넘게 참가하고 있다.

그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하면서 또 하나 사는 이유가 생겼다. CNN에 전쟁 소식이 들리면 다른 생각이 없다. 그곳에 빨리 가야 한다. 그곳에는 복잡하지 않은, 사랑에 굶주린 생명이 있다.

김혜자에게 생애에서 가장 충만한 경험은 임신이었다. 임신기간 내내 인형으로 아이를 목욕시키는 연습까지 했다. 아이가 네 살이 될 때까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아이였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는 데 섭섭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이를 안고 있으면 그 순간도 참지 못했다. 그 정도로 열중했다.

아이가 커서 친구들을 좋아하기 시작할 무렵 연극을 시작했다. 연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아이가 친구 만나러 가는 것이 섭섭했고 그 공백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꼭 지키려는 것이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부엌일은 하지 못하지만 집은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일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가 없어 막막하고 쓸쓸했던 기억 때문이다.

모태신앙. 예쁘셨던 어머니. 혼자 있던 분. 그러나 기억이 별로 없다. 큰 집에서 살았다. 집에서 영화촬영까지 할 정도로 대저택이었다.

아버지는 미국과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 경제학 박사. 미 군정시절 현재의 재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관직을 맡으셨다.

바쁘고, 늘 당신의 삶이 있었던 아버지. 외국인들과의 댄스파티. 외국인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 집은 늘 부산했다. 친척들도 많이 오고. 언니 조카 그리고 형부가 같이 살았다.

바로 위 언니와 16살 차이가 난다. 언니들이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많고 풍족했던 가정. 감사하지만 마음 한 가운데에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가족이 아닌 정원 돌보는 아저씨와 국립극장에 갔던 기억.

여성 국극단이 인상적이었다. 자주 가고 싶었다. 연기를 하게 된 동기. 배우는 절실했던 그 관심을 한껏 받고 살 수 있다.

연기는 직업이 아니다. 삶이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다. 자신을 바쳐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연기는 ‘연기’가 아니다. 누군가와의 절실했던 교류다. 그 교류는 절실했던 만큼 상투적이지 않아야 된다. 통상적인 삶은 흥미가 없다.

어릴 적 기억이 없는 것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교류의 가능성을 어린 나이에 연기로 설정한다.

남편을 만나 정신 없이 빠지고 일찍 결혼을 한 것이 바로 그 애정 때문이다. 집으로부터 빠져 나오고 싶었다. 바쁜 아버지와 아픈 어머니. 구조적으로 부모로부터 받을 수 없었던 그 애정과 열정에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준 남자. 어떤 행동도 수용했던 남자. 말없이 지켜봐 주었던 사람. ‘내가 없으면 어떻게 사냐’그렇게 말하며 죽어간 사람이다.

아이만 기르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좋았던 것은 독점적인 애정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커 가는 아이는 친구를 더 좋아하고…. 늘 잘했다고 칭찬하는 남편.

그러나 남편의 관심은 조금씩 그녀에게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각자 방에 있게 된다. 원래부터 현실은 답이 아니었다.

대본을 받으면 손끝이 떨리길 바란다. 새로운 캐릭터의 탄생은 생명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적 연기는 현실만큼 재미가 없다. 그 일상은 이미 생명력이 없다. 흥분도 없다. 삶과 죽음. 아름다운 사랑과 창조적 관심.

거울에서 얼굴이 사라진 날, 현실도 거울 속에 사라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연기는 연기가 아니다. 삶이다. 그렇게 절실했던 그 사랑이 이제는 그녀 마음 속에 그만큼 존재한다.

그 절박했던 사랑이 생명을 갖기 위해선 손끝 떨리는 대본이 필요하다. 창조된 성격만이 그녀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현실에서 유일하게 분노를 느끼는 분야가 세금문제다. 왜 배우는 가장일 수 없는가. 생활비나 병원비는 면제가 안 된다.

미용실 화장품 그리고 의상비만 면세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빼앗아 가서 좋은 데 쓰면 억울하진 않겠다. 그렇게 되도록 비는 수 밖에는 없다.

●약력

▲서울출생

▲경기여고 졸업

▲이화여대 생활미술과 2학년 수료

▲1962년 KBS공채 1기로 데뷔,69년 MBC개국과 함께 스카우트

▲주요 출연 작품=학부인,엄마 아빠 좋아,후회합니다,겨울안개,방황의 끝,모래성,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사랑이 뭐길래,엄마의 바다,장미와 콩나물,전원일기,그대를 알고부터(이상TV) 19그리고 80,우리의 브로드웨이 마마,셜리 발렌타인(이상 연극)만추,마요네즈(이상 영화)

▲1988,92,99년 MBC방송대상,1983년 필리핀 마닐라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1988년 동아연극상 연기상,1999년 인도영화제 작품상

■지인들이 보는 김혜자

디자이너 이신우와 김혜자의 오랜 우정은 연예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경기여중 경기여고 이화여대를 같이 다닌 그는 지금도 1주일에 한 번은 김혜자를 만나 그가 입고 나서는 거의 모든 옷들을 디자인한다. ‘셜리 발렌타인’에서 관객의 찬사를 자아냈던 순백의 원피스도 그의 작품이다.

“딸(디자이너 박윤정)이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몰래 카메라로 찍으면 정말 볼만할 거래요. ”

두사람은 성격이 비슷하다. 말이 많지 않고, 살림이나 자녀 이야기 등 그 나이대의 관심사에는 도무지 흥미가 없다. 사람들이 보면 우스울 정도로, 너무도 순수하고 이상적인 가치들 즉 아프리카의 굶주리고 아이들이나 감명받은 시 구절 등이 주 화제이다.

특히 김혜자는 한번 감명받은 일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이야기할 만큼, 순수하고 외곬수이다.

이신우씨는 “연예계 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고서도 적당히 타협하는 법이 없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래서 받은 불이익도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한부 암환자로 나온 드라마에 출연할 때는 뚜렷한 병명도 없으면서 그렇게 아파하더라구요. 열이 심해 손바닥까지 벗겨지고…대단한 정열이지요. 그래서 인간 김혜자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미남ㆍ미녀 연예인들의 사진을 찍어온 작가 김중만씨는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연예인’으로 서슴없이 김혜자를 꼽는다.

그는 “존경을 해야 마땅하겠지만, 자꾸 ‘여자’로 보인다. 정말 아름답지 않느냐”고 되물으며 “타고난 재능과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분이지만,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그런 내면적인 의미보다는 섹슈얼한 쪽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가 보는 김혜자는 ‘타고난 공주’다. 물론 그 흔한 ‘이쁜 척’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천진함과 여성스러움, 소녀처럼 예민하면서도 풍부한 감정표현이 철저히 내면화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원일기’의 ‘김회장 사모님’에 익숙한 시청자에게는 낯설 수도 있겠지만….

양은경기자

k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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