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난동패 훌리건(hooligan)은 왜 유독 영국에 많을까. 축구 종가(宗家)라는 사실만으로는 인과관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여러 요인이 복합됐겠지만, 영국의 제국주의 역사에서 바탕을 찾는 분석이 그럴 듯 하다.영국은 오랜 제국주의 시절 해외 경략 전쟁을 거듭했고, 어디나 그렇듯이 해외 전쟁은 사회의 불만ㆍ소외 계층이 억눌린 에너지를 발산하는 배출구가 됐다.
그런데 대영제국의 영광이 쇠퇴하고 국가적 활동 반경이 축소되면서, 그 호전적 에너지가 대중 스포츠 축구에 쏠려 훌리건 난동으로까지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명 높은 영국 훌리건을 적당히 용인하는 것이 영국의 제국주의 복귀와 해외 침략을 막는데 유용할 것이란 우스개도 있다.
그러고 보면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내로라 하는 전통의 축구 강국이 모두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또 유럽과 나란히 세계 축구 판도를 양분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축구 강국은 유럽 열강의 옛 식민지들이다.
이밖에 나라마다 축구 비슷한 전통 경기를 즐겼다지만, 결국 유럽의 전형이 지금껏 우월한 경쟁을 이끈다.
우리의 첫 승 영웅 히딩크는 물론이고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축구를 월드컵 수준으로 끌어올린 지도자가 모두 유럽과 남미 출신인 점은 그 단면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이치로는 자연스럽지만, 스포츠에도 ‘문화 제국주의’의 어두운 면이 있다.
월드컵이 국제축구연맹(FIFA)과 글로벌 기업의 상업적 결탁을 통해 번창하고, FIFA를 복마전으로 만든 것을 새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축구 열정이 세상과 삶을 밝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좋지만, 절실하고 긴박한 이슈마저 가려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48년 만에 이룬 월드컵 첫 승에 온 나라가 한껏 들뜨는 스포츠 열기는 대영제국의 침략 역사와 대통령 아들 비리 따위뿐 아니라, 개인의 삶의 그늘마저 잊게 한다.
유엔 회원국보다 많은 나라 국민이 함께 환호하고 탄식하는 월드컵은 그래서 진정으로 글로벌한 문화 체험으로 불린다. 그 바탕은 개인 장비가 필요 없는 축구의 원초성과, 올림픽과 달리 약소국도 강대국을 이기는 평등한 경쟁이 꼽힌다.
그러나 월드컵 첫 승이 열광하는 개인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없듯이,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기는 축구의 오묘함이 국제 질서의 불평등과 모순까지 시정하지는 않는다.
월드컵에 가려진 국제 이슈, 쿠바 미사일 위기이래 처음으로 핵전쟁 위험이 거론된 인도ㆍ 파키스탄 사태가 바로 그렇다.
반세기 가까이 인류를 불안케 한 핵무기 종주국 미국과 소련도 감히 엄두내지 못한 핵전쟁이야 할까 하겠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인도ㆍ 파키스탄 적대는 제국주의 식민통치와 강대국 세력균형 정치의 해악이 근본에 깔려 있다. 카슈미르를 해결책 없는 분쟁지역으로 남겨둔 것은 식민 종주국 영국이고, 두 나라의 핵무장을 도운 것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이다.
이들이 지금 중국과 북한이 핵물질과 미사일을 공급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더 큰 책임을 덮는 기만이다. 그리고 최근 긴장과 대치도 미국과 서구가 벌인 아프간 전쟁이 이 지역 질서를 흔든 데서 비롯된다.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은 분쟁을 조장하고서도 다른 한편 긴장 해소를 위한 중재에 나서는 제스쳐를 보인다. 그러나 분쟁 당사국 정부를 제외한 일반 국민은 전쟁 위험보다 월드컵 경기에 대한 관심이 훨씬 크다고 한다.
그게 축구와 월드컵의 긍정적 기능일 수 있다. 다만 FIFA 랭킹 100위 밖 국가의 국민까지 나라 걱정보다 월드컵에 매달리는 것은 훌리건보다 오히려 한심하다.
축구가 ‘글로벌 언어’라는 수사(修辭)를 마냥 믿을 건 아니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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