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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온 겨레가 함께 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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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온 겨레가 함께 뒤었다

입력
2002.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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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다.참 잘했다.경기가 끝났을 때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느 새 우리는 모두 서 있었다.발을 구르고 두 손을 휘저으면서 모두 껑충거리고 있었다.정말 이긴것이다.가마산(부산) 가마 속에서 끓을 대로 끓은 온 겨레 마음들로부터 승리가 요출하고 있었다.애태우면서 기다린 경기였다.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하지만 이제는 폴란드와의 경기때문에 더 초조할 남은 시간은 없다.더 뛰어야 할 남은 공간도 없다.우리는 첫 경기를 승리로 끌어 낸 것이다.

나는 흥분과 감격이 큰 강물처럼 빠져나가는 흐름의 뒤끝에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나는 이제 목이 터져라 더 소리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제 더 달리지 않아도 된다.황선홍이 폴란드의 골문을 향해 내달릴 때면 나도 그렇게 그와 달리고 있었다.폴란드의 공이 우리 골문을 향해 내달릴 때면 나도 홍명보와 함께 길목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폴란드의 침투를 막고 있었다.우리 선수들이 숨이 차면 나도 그렇게 헐떡거렸고,땀으로 온 몸이 젖을 때면 나도 그랬다.쓰러진 선수와 더불어 나도 쓰러졌고,잘못된 패스로 온 경기장이 아쉬운 탄식을 토해낼 때면 그 주역은 바로 나였다.

유상철과 설기현이 교체됐을 때 나도 그러게 나오고 들어갔다.그리고 마침내 골이 들어갔을 때 그 공을 차 넣은 황선홍도 바로 나였다.나는 경기 내내 한번도 관중석에 있지 않았다.나는 응원하는 자리에서 한가하게 소리나 지르고 있지 않았다.붉은악마들도예외가 아니다.아니 도대체 이 경기에서 우리 국민중 누가 감히 관객이었을까.

눈을 감았다.현란한 온갖 것이 사라진다.눈을 감았을 뿐인데 들리는 소리조차 없다.갑자기 얼굴들이 떠오른다.기덕이 얼굴이 보인다.병만이도 보인다.그래,참 오랜만이다.이제는 반 백년도 더 되는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 이 감격의 자리에서 너희들을 본다.

황토바닥에 모래가 깔린 운동장.새끼줄로 엮은 골문,기덕아,네가 공을 잡고 상대편 골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이름조차 연호할 줄 모르던 그 때,우리는 그저 야,야,하고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그 때 너는 맨발이었다.병만아,네가 마지막 공을 놓치면 우리가 믿을 것은 그저 운명뿐이었다.너는 우리의 기둥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대항 축구경기가 열리던 날,운동장 한 구석에서 애비없이 자란 네게 남이 볼까 조심스레 생계란 두 개를 깨뜨려 먹여주시던 네 할머니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그것을 내가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너는 졸업할 때까지 나한테 어색한 웃음을 지니고 살았었고.

눈을 뜬다.친구들 얼굴이 사라진다.아직 낮처럼 환한 조명 아래 축구장은 파란 잔디로 바다만큼 넓다.급한질주,갑작스러운 멈춤,넘어지고 뒹굴고,차고 던지는 몸짓들이 다시 보인다.그런 몸짓들이 내는 온갖 격한 소리들이 다시 들린다.그리고 거기 혼을 다해 뒤던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얼마나 장한 얼굴들인가!그런데 거기 실루엣처럼 겹치는 역사의 얼굴들,그들도 오늘 여기 부산 경기장에서 우리와 함께 뛰었음에 틀림없다.

도시는 잠들 줄 모른다.부산뿐이랴,온 나라 모든 곳이 그러리라.모든 이들의 마음이 그러리라.이미 한 밤인데 아기들이 잠을 설칠까 두렵다.하지만 어떠랴.어차피 그 아기들이 내일의 주인들인데 오늘 빚어진 역사가 그 자을 깨게 한들.

바야흐로 우리는 첫 번째 승리를 이룬 것이다.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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