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문명비평가인 자크 아탈리(59)가 월드컵을 맞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사무총장 김여수)가 주최하는 '문화와 민족간 이해 증진에 관한 월드컵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아탈리는 1일 오전 10시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홀에서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 동티모르 외무장관, 타다시 야마모토 일본 국제교류센터 소장,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와 한승주 전 외무장관, 한상진 서울대교수 등 한국의 정관계·학계 인사와 함께 한반도 및 세계 평화 증진을 위한 원탁토론을 나눈 뒤 2일 출국할 예정이다.학문과 예술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 그에 바탕한 문명비판적 시각으로 수많은 저술을 발표한 아탈리는 동양 문명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번 방한은 다섯번째. 31일 그를 만나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하는 월드컵의 의미, 인터넷과 생명공학 등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탈리는 1시간 30여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자세로 시종 성실하게 답변했다.
-이번 방한의 소감은.
"수천 년에 걸친 한국의 역사와 한국 사회가 근대사에서 겪었던 비극의 양상,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인류애와 민주주의에 있어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제 책이 한국에서 많이 번역돼 나와 더욱 반갑습니다."
-이번 2002 월드컵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것을 보니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양국이 협력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최근 복제인간 여성을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 '복제인간의 사랑을 위하여'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복제인간에 대한 견해는 무엇입니까.
"복제 인간은 불가피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지금처럼 한 사람의 게놈을 복사해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켜 진행하는 복제 연구는 덜 비극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복제된 인간과 원래 인간은 공통적인 유전적 환경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기억과 자아의 정체성까지 복제하는 진정한 복제인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언젠가 정신의 영역까지 복제하는 날이 온다면 바로 인류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문명의 미래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낙관적입니까, 아니면 비관적입니까.
"인류는 지금 아주 위험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인류에게 긍정적인 요소도 많으나 부정적인 측면이 상당히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가령 20세기 초 인간의 평균 수명은 40세였으나 21세기 초 인간은 120세까지 살 수 있으면서 다량의 살상 무기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선, 악이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저는 회의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축구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관람객 중에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대해 낙관적인 사람도 있고 비관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하는 선수는 경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관객이 아닌 선수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 견해는 낙관도 비관도 아니고 다만 선이 더 승리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미래에서 선이 승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인류가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계화입니다. 그 중에서도 환경 문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문제, 국가와 문화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문제가 매우 시급합니다. 일국가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힘든 이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세계정부가 창설돼야 하고 대륙 정부를 두어 국가와 세계정부의 중간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30억 명의 인구가 겪는 가난도 해결 가능한 문제입니다. 월드컵을 맞아 다국적기업이 어마어마한 광고비를 쏟아붓고 있는데 이들 기업이 전세계 월드컵 예상 시청자 수인 40억명에게 1달러식 기증해 월드컵특별기금을 마련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돈이 빈민기금에 맡겨져 4년만 지나면 2억명 인구의 빈곤과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극우 국민전선 당수 르펜이 후보로 나오고 네덜란드에서는 극우 지도자 핌 포트완이 피살당해 극우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극우주의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숫자상으로 보면 1998년과 2002년 대선에서 르펜이 얻은 표 수는 거의 비슷합니다. 르펜의 부상은 좌파를 찍던 사람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시민들이 사회민주주의보다 자유 개념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급작스런 세계화의 진행에 대한 불안감을 표시하는 나름의 반응으로, 겁에 질려 대중주의에 기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1997년 출간한 저서 '21세기 사전'에서 정보와 빈부의 문제가 긴밀히 연결될 것으로 보고, 인류가 '하이퍼 유목민'과 '인프라 유목민'으로 나뉠 것으로 예견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이퍼 유목민은 첨단 기술을 잘 알고 거기에 관련된 모든 도구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여행 또는 가상의 여행을 즐기는 부류의 사람이고, 인프라 유목민은 살기 위해서만 이동을 하는 족속입니다. 현대는 정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지식을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빈부의 가장 큰 잣대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보의 격차도 커지고 있습니다. 정보를 가지고 있는 계급은 10억명 정도로서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 중국의 일부분의 사람들에 한정됩니다. 그런데 첨단기술이야말로 빈곤의 격차를 줄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빈민구제 국제기구인 플래닛 파이낸스(PlaNEt Finance)에서 운영 중인 'E-학습(E-learning)'이라는 프로그램은 인터넷이 정보의 격차를 줄이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하지만 시장이 인터넷에 대한 욕구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국가적 차원의 도움도 있어야 하지만 자원봉사단체, 개인, NGO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의 비영리적인 참여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축구를 통한 민족과 문화 간의 이해증진'이라는 주제로 토론하기 위해 방한했는데, 혹시 축구가 부정적인 의미의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까.
"일부 유럽 국가에 말썽 많은 훌리건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프랑스 사람들도 자국 대표팀이 승리하기를 기원하지만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감정 째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축구 경기가 끝나면 양팀 선수들이 서로 포옹하지 않습니까? 저는 인류가 세계의 전쟁을 축구로 대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화기자
■자크 아탈리는 누구
알제리 출생의 유대계 프랑스인 자크 아탈리는 프랑스의 파워엘리트 코스를 다 밟은 대표적인 수재다.그는 한 곳만 졸업해도 수재 소리를 듣는 그랑제콜을 4곳이나 거쳤다.공학도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거쳐 인문학을 전공했고,대학 교수와 행정가를 거쳐 은행가와 소설가로도 활약하며폭 넓은 지식과 경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저술을 발표했다.그의 30여 권의 저서는 20여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300만 부 이상 팔렸다.
아탈리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 미래 인류사회를 '유목 사회'로 규정한 문명예측서 '21세기 사전'(1997년 작)이 소개되면서부터.이 책은 아탈리가 400여 개의 용어로 인류 미래상을 설명한 독특한 서술 방식의 에세이다.
미래 세계의 최상층 계급을 표현하는 데 종종 사용되는 '하이퍼 유목 계급'은 바로 아탈리가 만들어내 조어다.그에 따르며 하이퍼 유목 계급은 특허,전문지식,기량.이노베이션,창작 등 문화 관련 수입으로 사는 사람들.이들은 자유주의적 의미의 기업인도 아니고,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의 자본가도 아니다.이들을 최상층 계급으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휴대폰,노트북,스크린 안경 등 첨단 정보기술이 낳은 이른바 '유목 상품'이다.
아탈리는 현재 인터넷을 통해 저개발국 경제를 돕는 국제민간기구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실천적 지성이기도 하다.
31세 때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사회당 당수의 경제고문으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아탈리는 미테랑 대통령의 정치특보로 발탁돼 무려 10년 동아 국가 경영을 기획했다.이 시절 그는 유럽통합의 청사진을 마련했다.그가 쓴 소설 '영원한 삶'은 1990년 프랑스문학가협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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