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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노인을 잘 돌보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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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노인을 잘 돌보는 나라

입력
2002.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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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백이열전에 보면 매우 흥미로운, 그러나 간과하기 쉬운 기록 하나가 눈에 띈다.그것은 백이와 숙제가 고죽국(孤竹國)의 임금 자리를 사양한 후 숨어 살다가 만년에는 주(周)나라를 찾아가는데 주나라로 가는 이유가 다름 아닌 "주나라의 서백(西伯)이 노인을 잘 돌본다"는 소문 때문이라는 기록이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백성들이 어느 나라로 찾아간다는 것은 그 만큼 그 나라의 위정자가 유덕함을 의미했다.

고죽국의 두 늙은이를 주나라로 오게 만든 서백은 훗날 그의 아들 무왕(武王)에 의해 문왕(文王)으로 추존된 바로 그 사람이다.

주공(周公)의 아버지이자 공자로부터 마음 깊이 존경을 받은 문왕의 지덕(至德)은 결국 천년왕국 주나라를 건설하는 기틀이 되었던 셈인데 그 지덕의 구체적 부분 하나가 바로 ‘노인을 잘 돌본다’는 사실에 있었음은 매우 시사적인 것이라 하겠다.

한 나라가, 혹은 한 나라 국민이 노인을 잘 돌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노인은 사회적 역할을 끝내고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득한 옛날 그들이 군사력에 기여하지 못하였듯 오늘날에도 그들은 수출고나 성장률 제고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많은 의료비를 쓸 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여 그들의 노동생산성을 저해하고 있다.

자본이 전횡하는 시대에 그들은 도무지 자본의 논리에 어울리지 않는 구차한 사회적 짐에 불과하다. 동물의 세계에서라면 그들은 늙은 코끼리처럼 무리의 주변에 어슬렁거리다가 이윽고 고독한 최후를 맞는 것이 정해진 질서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인간의 사회에는 그 이상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한 자유, 정의, 친애 등의 높은 척도들은 바로 동물의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 더 높은 논리들을 통해 확보되고 있다.

인간의 사회에서 노인은 단순히 도태되어 가는 늙은 코끼리가 아니다. 그들도 한 때는 한 시대의 주역들이었다.

식민지의 절망 속에서 민족 자주의 꿈을 담아온 주역이었고 참담한 전화 속에서도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쳐온,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다.

또 국가 재건의 대열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땀 흘렸던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인과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설혹 그들이 물려준 현실이 한없이 비참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들을 존중하고 돌볼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역할을 끝내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인간이고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 더 순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여전한 인간됨에 진지할 때 우리가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들을 배제하거나 소외시킨 곳에서 우리만이 인간으로 보전되지 못한다는 이 화엄(華嚴)적 관계는 실로 신비로운 것이다.

어쩌면 노인은 우리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한 하나의 신탁(神託)으로서 우리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은 손을 벌려 누군가의 따뜻한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면 어느 시대든 그러한 요구 앞에 있었고 매 시대는 제가끔의 응답을 통해 그 시대를 증거해 온 셈이다.

3,000여 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 진실했던 한 응답은 한 왕조를 일으키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오직 물신(物神)만이 횡행하는 이 조악한 현실에서도 그 원리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늙고 병들고 냄새 나는 노인들을 국가적 차원에서든, 국민 개개인의 차원에서든 진심으로 공경하고 돌보는 이 비생산적인 행위가 누구나 속수무책이라고 말하는 이 눈 먼 문명에 결극(缺隙)을 낼 저 대안의 패러다임과 무관하다고 누가 감히 단정하겠는가!

이수태·수필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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