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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인호씨 기고 / 오라, 승리여·오라, 붉은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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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인호씨 기고 / 오라, 승리여·오라, 붉은 희망이여

입력
2002.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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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헌 옷가지를 뒤져서 빨간 티셔츠 하나를 찾아내었다.지금 이 나이에 무슨 빨간색 옷을 입느냐고, 주책이냐고 하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이 옷을 입고 다닐 것이다.

우리의 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붉은 태양과 같은 빨간 옷을 입고 붉은 악마가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붉은 색은 고구려 민족의 깃발색.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들 중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붉은 깃발을 든 군사들뿐이다.”

광개토대왕은 이 붉은 깃발을 든 고구려의 군사들을 앞세워 만주의 대륙벌판을 정복하고 쳐들어온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들을 물리쳤다니, 오늘 아침 내가 입은 빨간색 티셔츠는 그리하여 붉은 깃발이 될 것이다.

나는 빨간색의 티셔츠를 입은 붉은 악마가 되어서 우리 선수들을 위해 목이 터져라고 응원할 터이니.

보라, 지저분하고, 혼탁하고, 테러 투성이의 지구촌, 내팽겨쳐 버리고 싶고 부패하여 냄새나는 쓰레기와 같은 저 형편없는 정치판에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 희망을 둘 수 있겠는가.

그나마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우리의 태극전사들이 잘 싸워 16강에 오르는 것. 아니다. 16강이 무엇이랴.

8강에도 오르고, 4강에도 오르는 것.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도대체 어디에다 희망을 둘 수 있겠는가.

그것이 무슨 죽고 사는 일이냐고. 그것은 다만 승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어차피 스포츠는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웃기지 마라.

나는 이제 이기는 것을 보고 싶다.

제발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페널티킥이 없이, 어쩌다가 흘러나오는 볼을 우격다짐으로 구겨넣는 일 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새처럼 몸을 날려서 골키퍼가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빈 공간을 향해 우리의 선수가 찬 볼이 날, 날, 날아가서 철렁 찢어질 듯 그물이 출렁거리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이제 지쳤다. 지는 것을 보는 것도 지쳤으며, 살아가는데도 지쳤으며, ‘최선을 향해 싸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나는 지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나는 이제 신물이 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우리의 태극전사들이 폴란드를 이기는 것을 보고 싶다.

가슴 졸이며 보는 경기는 이제 정말 싫어. 투지만을 앞세워서 헛발질을 하는 것도 이제 보기 싫다. 나는 우리의 태극전사가 미국을 이기고, 포르투갈을 이기고, 이탈리아를 이기고, 프랑스를 이기는 것을 보고 싶다.

결혼반지에 입을 맞추는 안정환의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승리의 골은 다시 넣어져야 한다. 유니폼을 벗어던지는 땅꼬마 이천수의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경기는 계속 되어져야 할 것이니.

아 아.

나는 오늘부터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다닐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기면 광화문에 무릎 꿇고 흙 다시 만져보며 바닷물처럼 춤추는 대지에 엎드려 입을 맞출 것이니. 오라, 승리여. 그리고 오라, 붉은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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