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월드컵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닙니다.갈등과 대립의 역사가 화해와 융합의 역사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살아 있는 이벤트이자 새로운 희망의 빛입니다.
21세기 첫해에 일어난 9ㆍ11 테러를 계기로 문명과 문화는 대립ㆍ충돌하느냐, 화해ㆍ융합하느냐가 세계 지식사회의 쟁점으로 떠 올랐습니다.
9ㆍ11일 테러가 문화 마찰과 문명 충돌을 상징했다면, 내일 막을 올리는 월드컵 대회는 정반대로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를 담게 됩니다.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대회를 전쟁을 하기도 하고 식민통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마찰이 컸던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합니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역사를 가진 두 나라, 아직 감정의 앙금이 남은 두 나라가 전 세계에서 연 400억 명이 지켜 볼 큰 잔치를 함께 여는 것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역사상 두 나라가 같은 목표를 위해, 전 세계를 맞는 주인이 되어 함께 손을 걷어 붙인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9ㆍ11 테러와 아프간 전쟁으로 불안과 공포 속에 21세기의 아침을 맞았던 인류는 이제 자폭 테러의 처절한 젊음 대신 열정에 가득찬 몸짓으로 초록 잔디밭을 달리는 아름다운 젊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메시지는 축구 특유의 상징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축구는 특정 지역에서만 인기를 끄는 야구나 미식 축구 등과 달리 세계 모든 나라, 종교와 언어, 문화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입니다.
축구는 우연과 단순성, 약간의 일탈적 요소가 깃든 탈(脫)문명적 성격이어서 문명에 지치고 사회에 억눌려 온 모든 사람들에게 열광적 발산과 해방감을 줍니다.
모든 운동은 손으로 하지만 축구는 절대로 손을 써서는 안됩니다. 문명ㆍ문화를 상징하는 손 대신 동물도 가진 발을 사용합니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손에서 나왔습니다. 더욱이 르네상스 이래의 서구 문명은 손으로 상징되는 도구적 이성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구의 세계는 기술 문명의 상징인 손 대신 어머니 태내의 첫 움직임인 발길질을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원초적 몸짓, 생명 특유의 신선한 역동성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축구 열기는 인간 의식의 바닥에 깔린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향수인지도 모릅니다. .
축구는 켈트어로 태양을 뜻하는 ‘수라’라는 민속놀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던 아주 오래 된 태양 뺏기 놀이에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태양은 세계와 생명의 원초적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문명에 지쳤습니다. 태양이 너무 모자랍니다. 둥근 축구공은 원시에 빛났던 태양입니다.
태양은 근원적 빛입니다. 산업 사회가 종말을 고하고 있는 시점에서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인류에게 비치는 새로운 희망입니다.
구체는 융합과 화합을 뜻합니다. 축구공은 32쪽의 서로 다른 5각형과 6각형이 어울려 구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 흑백 정반대의 색깔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모양과 색깔이 절묘하게 어울린 축구공이 세계를 열광시킵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세계를 향한 아시아의 발신이 시작됩니다.
*이 글은 한국일보와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 1999년부터 6개월마다 한일 이해의 길을 주제로 양국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좌담회를 열었습니다.
이 글은 한국측 좌장인 이어령(李御寧) 전문화부장관이 월드컵 대회 개막을 앞두고 3년간의 좌담회를 매듭하면서 내린 결론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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