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5월30일 러시아의 혁명가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가 62세로 작고했다. 플레하노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가장 유명한 러시아 혁명가였다.그는 비록 자신이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10월 혁명 직후 쓸쓸한 죽음을 맞았지만, 당대의 명성에서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도 플레하노프를 앞지르지 못했다.
1898년 3월 벨로루시의 민스크에서 러시아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결성을 주도한 것도 플레하노프였다. 시베리아에 유형 중이었던 레닌은 창당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구달로프카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혁명 결사인 ‘토지와 자유당’에 참여하면서 혁명 운동 이력을 시작했다.
‘토지와 자유당’은 1879년 정치 혁명을 최우선시하며 테러리즘을 가장 중요한 투쟁 수단으로 삼는 ‘인민의 의지파’와 다소 온건한 노선을 취하는 ‘흑토(黑土) 재분할파’로 분열됐는데, 플레하노프가 이끈 ‘흑토 재분할파’가 사회민주노동당의 모체가 되었다.
플레하노프가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은 1883년 제네바에서 평생의 동지 파벨 악셀로트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노동해방단을 조직하면서다.
플레하노프는 이후 여러 저서를 통해 자신의 옛 동료들인 나로드니키를 비판하는 한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신문 ‘이스크라(불꽃)’를 레닌ㆍ악셀로트 등과 함께 편집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사회민주노동당 안에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에 대립하는 멘셰비키를 이끎으로써 뒷날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다.
서유럽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멘셰비키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삼았던 반면 볼셰비키는 의식화한 소수 정예의 직업 혁명가들이 이끄는 즉각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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