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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96)李承晩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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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96)李承晩 망명

입력
2002.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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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29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내외가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다.4월28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는 그 기간에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에 머물렀다.

이승만의 망명을 단독 보도한 당시 경향신문 윤양중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김포공항에는 그 날 새벽 타이베이(臺北)에서 날아온 CAT 전세기가 대기중이었고, 과도정부 수반 허정이 이승만 부부를 전송했다.

전세기에는 이승만 부부와 기장을 포함해 다섯 사람이 탔다. 하와이는 마흔 전후의 이승만이 국민회(國民會)를 통해서 외교론에 바탕을 둔 독립 청원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망명 당시 85세의 고령이었던 이승만은 하와이에 닿자 곧 거동이 불편해졌고, 90세가 되던 1965년 7월19일 그 곳에서 작고했다.

그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치됐다. 많은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것은 씁쓸한 일이다.

망인(亡人)에 대한 너그러움이 인지상정이라고는 해도, 이승만의 죽음이 국민적 애도에 값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장기 독재 문제를 떠나서, 그는 6ㆍ25 전란 초기 서울 사수와 북진통일을 공언한 뒤 그 발언이 방송되기 직전에 국민을 사지에 버려두고 내뺀 인물이다.

한국사의 불행 가운데 하나는 국민이 직접 군주의 목을 베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최고권력자에 대한 부당한 경외심을 낳았다. 서유럽 민주주의의 바탕에는 군주 처형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

경무대(청와대) 생활 앞뒤에 이승만 내외가 살던 이화장은 본디 조선 중기의 문신 신광한(申光漢)의 집터로 신대(申臺)라고 불렸다.

이화장 안의 조각정(組閣亭)은 이승만이 거기서 초대 내각을 확정해 발표했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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