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3일 이었다. 맞선자리에서 대뜸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있느냐“고 답했다. 그 자리에서 청혼을 받았다. 30번째로 선 본 여자, 이젠 선보는 게 지긋지긋하다고도 했다.
그것이 10년 가까이 지속된 질곡의 세월-모진 시집살이와 투병, 그리고 자살시도로 점철된 결혼생활의 서막이었다.
“두렵고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남편이 참 좋은데 이 글 때문에 혹시 오해받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자살시도라는 정말 큰 죄를 지었던 부분도 감추고 싶었고…”
수상자 인터뷰를 위해 만난 최도선(44ㆍ경북 포항 북구 창포동 645번지)씨는 글을 통해 막연히 상상했던 모습과는 퍽 달랐다.
50대 후반 다소 지쳐보이는 얼굴을 기대했다면 실제의 최씨는 40대에 아직도 처녀시절의 고운 자태가 살아있는 활기차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읽는 사람조차 억장이 무너지는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왜 내게만 삶이 이렇게 지독하냐고 절망한 적도 많았어요. 그때마다 그래 이 놈의 운명, 내가 정면으로 도전해서 바꿔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런 도전의식이 저를 지탱한 것 같습니다.”
남편 윤영진(50)씨는 2남 1녀중 막내였다. 그런데도 척추카리스에(결핵)라는 희귀병에 걸려 대소변조차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어머니(89년 작고)를 모신 것은 생전의 남편과 똑같이 생긴 막내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과 집착이 유별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가망없다며 치료를 거부한 시어머니를 위해 사람의 뼈부터 지네, 똥소주 등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해야 하는 병구완은 며느리 최씨의 몫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못 이겨 며느리를 잔인하게 내모는 시어머니, 병든 어머니와 고생하는 아내 사이에서 방황하다 타락을 거듭하는 남편에게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면서도 최씨는 그 가시밭길을 고스란히 자기 몫으로, 남에게 미루지않고 견디어냈다.
수상소식을 접한 날은 마침 이젠 성년이 된 외아들(20ㆍ창원대2 휴학)이 입대하는 전날이었다.
자필로 쓴 어머니의 원고를 밤새워 컴퓨터에 입력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아들은 ‘좋은 입대선물 갖고 간다’며 기뻐했다.
‘남들처럼 신혼에 재미있게 살고 싶었지만 병든 어머니 섭섭해 하실까 봐 오히려 아내에게 잘 못해준 것이 두고두고 미안하다’는 남편은 지난 해 일부러 명예퇴직을 신청해 퇴직금으로 전원주택지를 구입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직접 작업실을 만들어줄 계획이다.
최씨는 “남편이 보기 드문 인생을 살지 않았느냐며 수기공모를 권해서 썼는데 쓰는 내내 울었다”면서 “앞으로는 절대 뒤 안 돌아보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이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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