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7일 새벽 5월 항쟁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전남도청 옥상에서 산화했다.향년 30세.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ㆍ전남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민주화운동’ ‘시민항쟁’ ‘민중항쟁’ ‘무장봉기’ ‘광주코뮌’ 같은 이름에는 그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들이 투영돼 있다. 그 해 5월의 광주를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윤상원은 걸출하고 헌신적인 5월의 전사였다.
전남 광산에서 태어나 전남대 정외과를 졸업한 노동운동가 윤상원은 5월항쟁 내내 선전 활동의 탁월한 기획자이자 실행자로 일했다.
최초의 호소전단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해 각종 선언문과 ‘투사회보’ 의 편집ㆍ제작ㆍ배포를 지휘한 것이 그였고, 수습위원회의 투항적 자세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 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앞장서 조직한 것도 그였으며,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항쟁의 대의를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것도 그였다.
그와 최후를 같이 했거나 끝까지 도청에 남은 지식인 동료들 대부분이 공수부대가 장악한 항쟁 초기의 광주를 일시적으로 떠났던 데 비해, 윤상원은 시종일관 이 ‘빛의 땅’을 지키며 도청 접수에 참가했고, 결국 반란군의 물리력에 맞서 싸우며 목숨을 담보로 5월 광주를 역사의 비석에 깊이 새겼다.
1980년대의 대표적 운동가요 ‘님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과 그의 노동 동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바쳐진 것이다.
황지우의 시 ‘나는 너다’의 한 대목. “사식집이 즐비한 을지로3가, 네 거리에서/ 나는 사막을 체험한다/ 여러 갈래길, 어디로 갈 테냐/ 을지로를 다 가면/ 어느 날 윤상원로가 나타나리라/ 사랑하는 이여/ 이 길은 대상이 가던 비단길이 아니다/ 살아서, 여럿이 가자.”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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