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 세계적인 축구 강호들이 속속 입국한 이번 주 일본 열도는 모처럼 월드컵 열기로 달아오른 것 같았다. 신문과 방송들은 스타군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연일 자세히 보도하며 국민에게 몇일 남지않은 월드컵대회의 개막을 주지시켰다.그러나 이 같은 열기는 당초의 기대에 못미친다. 지구촌 최대의 축제인 월드컵 개막이 초읽기에 들어갔는 데도 일본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썰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다.
월드컵 국제미디어센터(IMC)가 문을 연 24일 오전 요코하마(橫浜) 사쿠라기(櫻木) 지역은 역 광장에 걸린 월드컵 깃발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눈길을 끌지 못했다.
월드컵 기간 중의 치안 확보를 위해 대로변 곳곳에 세운 1.5m 높이의 초소에서는 경찰관이 한산한 거리를 심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쿄의 중심지인 오테마치(大手町) 신주쿠(新宿) 등 주요 거리의 표정도 비슷하다.
오히려 야구 쪽의 열기가 훨씬 뜨겁다. 일본 사람들은 21~23일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스의 3연전을 마치 메이저 리그의 월드시리즈를 지켜보듯 열광했다.
정치적으로도 중국 탈북자 처리 문제로 위기에 몰린 외무성을 둘러싼 공방 등으로 어느 때보다 시끄럽다. 무엇보다도 극심한 불경기가 월드컵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관심을 반감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열기가 살아나지 않는 것은 일본측이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 대부분은 치안 불안을 이유로 월드컵 기간중의 캠핑을 불허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캠핑장 불허의 이유이다.
일본 경시청이 도심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한 생중계를 금지한 것도 같은 까닭이다. 또한 훌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과도한 대응과 불법체류 외국인의 증가 등을 우려하며 내세운 폐쇄적인 정책도 월드컵 붐 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월드컵에 대한 언론의 보도의지가 상대적으로 작은 점도 지적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4개의 지상파 방송이 64개 전경기를 중복해서 중계할 예정이다.
반면 일본은 NHK와 5개 민방이 40경기를 나누어 중계한다. 신문의 경우도 아사히가 월드컵 공식 신문으로 선정됨에 따라 다른 신문들의 월드컵에 대한 열의가 상대적으로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황성빈(黃盛彬) 리쓰메이칸(立命館)대 조교수는 “일본 정부의 지나친 치안중심의 대응과 매스컴의 소극적인 자세가 월드컵 붐의 조성에 마이너스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철훈기자
chkim@hk.co.kr
■"일본 16강? 글쎄요"
23일 일본대표팀의 캠프가 설치된 사이타마현 이와타시의 주빌로 이와타스타디움 정면에는 천막 스크린이 설치돼 있었다. 구장의 문틈을 통해 훈련모습이 외부에 공개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경찰력을 동원, 훈련장 출입구를 봉쇄했고 주차장 마저 폐쇄했다.
숙소인 고풍스런 여관에도 감시탑을 설치, 주변에 외부인을 얼씬도 못하게 한다. 때문에 이곳 언론들은 취재하기 어려운 대표팀 소식 보다 외국 평가전을 더 크게 다루고 있다.
현재 일본 국민들의 자국 월드컵 16강 진출 예상은 여전히 과반수가 넘지만 점차 확신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조사기관과 표본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확신한다’는 응답자가 1월 68%에서 4월 66%로 약간 감소하더니 최근들어서는 57.5%까지 떨어졌다.
이는 노르웨이전에서의 무기력한 패배가 원인. 반대로 H조 예선서 1승의 제물로 삼고 있는 벨기에가 프랑스와의 평가전서 2-1로 승리를 거두자 그 동안의 낙관적인 분위기가 더욱 위축됐다.
지난 해 10월부터 7개월간 무패가도를 달린 데다 조편성까지 유리, 내심 8강까지 노리는 등 자만하던 분위기가 일순 뒤바뀐 것이다.
필리페 트루시에 감독의 언행도 일본 국민들의 불안감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벨기에_프랑스전을 보느라 17일 국가대표 발표현장에 참석하지 않은 트루시에는 3일 뒤 귀국하면서 기자회견도 거부한 채 훈련장으로 향했다.
또 21일 기자회견에서는 간단한 입장 표명만 한 채 질문도 받지않고 나가버려 ‘트루시에 감독이 16강 진출이 의외로 만만치 않다고 보여지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요코하마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야나다 기요시(梁田 潔ㆍ48)씨는 “나 뿐만 아니라 회사동료들도 일본의 16강 진출 가능성을 낮게 생각한다”면서 “마치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야구팀이 맞붙는 것과 같다고 농담하고 있다”며 비관적인 반응을 전했다.
요코하마=이범구기자
goguma@hk.co.kr
■일본인 '문화 아노미'
“일본인은 너무 모범생이다. 즐겁게 살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세네갈의 월드컵 준비캠프인 시즈오카(靜岡)현 후지에다(藤枝)시의 실무담당자 오카무라 오사무(岡村修·52)씨가 최근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은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외국인은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지만 보통의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매우 일본적인 사건이다.
그가 자살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세네갈 팀이 약속도 안 지키고 파격적인 행동을 거듭하자 어쩔 줄 모르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분(分) 단위의 완벽한 일정표를 만들어야 안심하는 보통의 일본인인 그는 참을 수 없는 불안감때문에 패닉상태에 빠진 것이다.
자살한 오카무라씨 뿐만 아니라 월드컵 참가국 캠프를 유치한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들은 해당국의 문화적 차이에 적응하지 못해 무척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다. 해당국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일본인에게는 일탈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오이타(大分)현 나카츠에무라(中津江村)에 캠프를 설치한 카메룬은 당초의 약속을 깨고 5일이나 늦은 24일 도착했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주민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안스러웠다. 또 우루과이는 22일 니가타(新潟)에서 가질 예정이었던 친선경기를 단지 ‘피로하다’는 이유로 하루 전에 취소, 지자체 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 같은 사태는 월드컵 공동 개최국 일본의 관습과 문화를 배려하지 않는 해당국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너무 짜여진 틀 속에서만 일하는 일본인들의 사고 방식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한 정신과 의사는 “일본인이 지나치게 꼼꼼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며 몇 가지 대책을 제시했다. 한사람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지 말 것, 확실하게 쉴 수 있는 휴일을 마련해 줄 것 등이 그 골자이다.
도쿄=김철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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