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눈을 자주 감는다. 누구를 조금만 바라보아도, 쉬이 피로를 느껴서이기도 하지만 툭하면 빠져나가는 헛마음을 붙잡기 위해서다. 눈을 감고 걷고, 눈을 감고 듣고, 눈을 감고 생각하고, 눈을 감고 사랑하고, 눈을 감고 숨쉰다.”보이지 않으면 잊혀진다. 눈을 감으면 헛되이 부풀어오르던 욕망이 천천히 누그러진다.
눈을 감았다가 뜬 뒤 세상은 부드럽다. 감았다 뜬 눈 앞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의 몸짓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소설가 함정임(38)씨가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이마고 발행)를 펴냈다.
“어쩌면 영원히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던 첫 산문집에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나서 찬찬히 바라본 세상이 담겼다.
프랑스로, 로마로, 독일로 또 경주로, 강화도로 가는 여행길. 작가의 인생과 문학을 북돋운 소중한 사람들. 순간의 진실을 포착한 사진들. 함씨는 차분한 성찰의 기록을 공들여 적는다.
“여름에 떠났는데 돌아오니 겨울이었다. 삶은, 떠나기 전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희망보다는 희미(稀微)가, 결정보다는 모색이 우세할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워밍업이었던 것이다. 열 몇 살 때는 이십대를 위하여, 스물 몇 살 때는 삼십대를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의미심장한 워밍업 기간을 가졌던가.”
낯선 곳을 타박타박 걸으면서, 영감을 준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함씨는 자신이 걷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순간 순간을 언어로 옮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찮은 것들이 다가온다. 그 하찮은 것들이 모여 그의 삶을 이룬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눈을 감으면 그를 옥죄었던 분주함과 팽팽함이 잦아든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5년 전 훌쩍 세상을 떠난 남편, 소설가 김소진. 자전거의 페달을 밟을 때에도 단정했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작가는 이제 아들과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나고 소풍을 가고 TV를 본다. ‘그리움은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
몇 번씩 눈을 감고 또 뜨면서 그는 단단해진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는 기형도의 시가 어쩌면 그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도 모른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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