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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덕수궁옆 美아파트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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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덕수궁옆 美아파트 유감

입력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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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전, 옛 배제고 자리에 러시아 대사관이 들어서고, 캐나다 대사관이 이화여고 건너편에 빌딩을 짓기 위해 용도변경을 위한 로비를 할 무렵, 미 대사관도 대사관저 내에 빌딩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이 풍문이 현실화되고, 또 고층의 외국 공관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노라면, 우리는 정동에서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 상황을 다시 보는 듯 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이 정동에 대사관을 짓기 위해 들고 나왔던 근거는 외교시설을 취득하는 것에 대한 주재국의 협조를 구하는 '비엔나 협정'이었다.

미국 대사관도 이 협정을 들어 그들이 지으려는 8층짜리 아파트가 주택건설촉진법에 의해 규제 받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

건교부는 법의 시행령을 바꿀 의사를 밝히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서울시도 신청이 들어오면 거부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절차가 참으로 온당치 않다고 본다. 지을 수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미 대사관측은 아파트 건립 계획을 오래 전부터 추진해 왔고, 적당한 시점이 되자 우리 정부에게 압력을 가해 사업 승인을 얻고자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누가 봐도 외교적이지 못하다.

서울에 있는 외국 공관원 직원들의 많은 수가 용산구 일대 주택가에 몰려 살고 있다.

만약 미 대사관 아파트가 공동주택의 관리에서 예외가 된다면, 외교관들이 머무는 다른 공동주택들도 그렇게 해주어야 할 지 모른다.

따라서 미 대사관 아파트 신축은 절차의 부당성 문제에 더해 형평성의 문제를 제기해 외교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낳을 것이며, 나아가 주택관리와 관련된 도시계획상의 어려움도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금번 사안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정동 일대에는 과거 경운궁이 있었으며, 지금도 덕수궁, 정동교회 등 유수한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정동은 현재 서울 시민들이 가장 아끼고 즐겨 찾는 문화역사 지구이다.

그 동안 야금야금 들어선 고층건물로 정동의 역사경관은 이미 크게 훼손되어 왔지만, 미 대사관 숙소의 건립은 이 일대의 경관훼손에 치명타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건축예정 부지는 덕수궁을 바로 옆에 두고 있어 문화경관 보호에 극도로 신경을 써야 할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역대 왕의 영정을 모시고 다례를 올렸던 선원전이 있었던 터라 그 장소의 활용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관저 부지에는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장의 관사와 같은 근대 건축물이 있어 그 자체로도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관저 앞 덕수궁 돌담길 한 복판에는 순종이 즉위식을 가진 덕수궁 돈덕전이 있었으며, 부지 남쪽 끝에는 치욕적인 을사조약(1905년)이 체결되었던 증명전이 지금도 건재해 있다.

이렇듯 건축예정 부지 일대는 수많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런 곳에 미 대사관 숙소용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는 그 자체로서 우리 국민의 역사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화적 반달리즘'이 될 수 있다.

입장을 바꾸어, 미국은 소중한 역사 유물이 있는 그들의 땅에 외국 대사관 숙소가 들어선다면 이를 과연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우리 정부의 처사도 마찬가지이다. 옛 경기여고 자리에 미 대사관 부지를 허용해준 실수를 범했던 정부는 이번에 또 다시 국민정서와 배치되는 방식으로 아파트 신축을 허가해 주려 하고 있다.

과연 무엇으로 후손에게 이를 설명할 지 모르겠다.

왜 하필이면 정동인가?

외국 공관이 집결되어 있는 용산구 일대에는 공관 직원들이 머물 수 있는 공동주택이 무수히 많으며, 그곳에 소재한 한 대학이 이전하면 비게 될 부지도 공관시설의 입지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주권을 존중한다면, 미 대사관 숙소문제는 여러 가지로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조명래(단국대 사회과학부 교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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