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가 최근 ‘임종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을 밝힌 데 이어 최근 보험심사평가원에서는 회복불가능 환자에 대한 진료비 지급을 거부했다.이런 일들은 ‘안락사 논쟁’에서 한걸음 나아가, 말기환자의 ‘의미없는 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말기 암환자에게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속되는 항암주사가 효과적인 치료법인가, 오히려 통증 억제와 요양이 환자에게 더 효과적인 진료는 아닐까.
경기 용인에 위치한 샘물호스피스와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의 말기 암환자들을 만나 답을 찾아본다. ≫
“김**님, 유 할머니 이제 천당 가신대요. 인사하셔야죠? 다음에 꼭 만나자고….”
샘물호스피스 원주희 목사가 위암 말기환자 유모(65)씨의 작별의식을 주선한다. 의식없이 누워있는 유씨.
옆 병상의 유방암 말기환자 김모(45)씨가 원 목사의 권유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를 지켜본다.
울부짖음과, 뼈를 깎는 듯한 비탄은 찾을 수 없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의 찬송가가 은은히 퍼지는 가운데 할머니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경기 용인의 샘물호스피스 입원실. 말기 간암환자 김모(48)씨가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병원 내에서 별명이 ‘리처드 기어’일 정도로 이목구비가 번듯하고, 비교적 컨디션도 좋은 편인데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바로 퇴원이다.
“집이 지하라서 습기차고 곰팡이 슬 텐데…마누라는 일 나가서 만원이라도 벌어야 하고….”
김씨는 97년 7월 간암 말기판정을 받았다. 그동안 암세포가 뼈까지 전이되어 항암제치료는 물론, 연골을 교체하는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다.
지난해 11월에는 척추까지 암세포가 번져 하반신까지 마비된 상태다. S대학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퇴원을 종용했고, 그는 버티다 강제퇴원을 당했다.
중견 건축업자로 나름대로 여유있던 생활이 4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지하의 단칸 사글세방으로 쪼그라들었다.
이곳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최장 2개월. 그동안 인생을 정리할 각오를 하고 들어왔지만 의외로 심신이 편안해졌다.
입원 당시 욕창투성이던 몸은 현재 짓무른 곳 하나 없이 깨끗하다.
“자원봉사자들이 하루 예닐곱 번 대변을 봐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보살펴 주세요.”
간호사들이 24시간 상주하며 아플 때마다 진통제도 처방해주고, 자원봉사자들이 목욕이나 대소변 가리기를 도와주고, 심지어 정성껏 기도까지 해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두 달 이상 사는 것이 두렵다. 마음 편하게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만난 폐암환자의 부인 이모(50)씨. 남편(53)이 폐암이 림프선까지 전이돼 20일 전 이곳에 왔다.
“3주째 항암치료를 중단한 상태인데 너무 편안해 합니다. 많이 나아졌어요.” 하지만 그녀는 ‘나아진다’는 단어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나지막이 속삭인다.
“앞으로 갈 길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진 것만 해도 어딘데요.”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 유방암 말기환자 최모(48)씨가 오랜만에 찾아온 시어머니, 올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병원서 10년동안 치료 받았는데, 낫지는 않고 얼굴은 맨날 퉁퉁 부어있었어요. 그래도 남편이 여기 오자고 할 때는 참 슬펐어요. 이대로 죽으라는 소린가 싶어서.”
이제는 암세포가 폐와 뇌까지 전이돼 의사로부터 2주 정도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받았다. 그래도 그는 행복하다.
얼마 전에는 바다가 너무 보고 싶어 간호사,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조심조심 정동진까지 다녀왔다.
■호스피스에 대한 오해, 그리고 편견
호스피스 진료는 치료(cure)보다는 돌봄(care)에 가깝다.
강남성모병원의 경우 의사, 간호사와 자원봉사자, 사목팀, 사회복지사가 한 팀이 돼 환자를 본다.
말기 암환자에게는 정서적 고립감과 외로움, 경제적 곤궁 등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응어리진 가족관계를 해결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박혜란 수간호사는 “20년간 각방을 쓰던 할머니를 몇 번씩 찾아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두 분이 화해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호스피스에 종사하는 의료진들은 “근간은 어디까지나 ‘완화의학’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흔히들 호스피스를 ‘죽을 준비’이자 ‘치료의 포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부분을 생략하고 정서적인 요소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정극규 강남성모병원 완화의학 전문의는 “말기 암환자의 가장 큰 고통인 ‘통증’을 다스리는 것이 호스피스의 핵심이다.
구토나 심한 기침, 변비 등 통증과 연관된 증상들의 완화도 호스피스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기 단계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병의 치료를 목표로 하는 항암 치료나 MRI, CT 등의 기계적인 검사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흔히 마약성 진통제에 대해 편견과 두려움을 갖지만 전문가들은 “말기 암환자에게는 금단증세가 나타나지 않으며 모르핀만으로도 통증의 80~90%를 완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00년 국내에서는 5만 8,042명이 암으로 사망했다. 이 가운데 호스피스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1% 미만이다.
호스피스 시설이 병원과 종교단체를 모두 합쳐 70여곳에 불과하고, 한 곳당 수용 가능한 인원도 20명 이내이기 때문이다.
원 목사는 “해마다 사망하는 암환자의 절반 만이라도 호스피스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호스피스 어떻게 이용하나
호스피스는 말기 암환자에게 심신의 안정을 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임종이 6개월 이내로 예견된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호스피스는 가정방문형 호스피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독립형 호스피스, 병원내 마련된 병동형 호스피스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센터는 병원 내에 호스피스 환자 병동이 따로 설치된 대표적 병동형 호스피스. 임종을 앞둔 많은 환자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기 위해 2주 이내로 입원기간을 제한하고 있으며, 유료이다.
주치의의 추천을 받고 호스피스 담당자와 면접을 한 뒤 순서를 기다려 입원할 수 있으며 통증조절이 어느 정도 되면 집에서 가정방문형 호스피스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부천성가병원, 성바오로병원 등이 가정방문형 호스피스를 활발하게 운용하고 있다.
독립 병동 대신 일반 병상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도 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이나 고대 구로병원 등으로, 주로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가정방문형 호스피스는 전문간호사나 자원봉사자가 가정으로 방문하는 제도다. 이화여대 가정호스피스, 모현호스피스 등이 있으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샘물호스피스는 독립형 호스피스로, 역시 후원금에 의해 무료로 운영된다. 한국호스피스협회(02-364-7893)이나 한국호스피스 완화의료학회(02-3779-1672)에서 전반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샘물의 집’에서 노래를 불러주며 말기 암환자의 심신을 달래는 자원봉사자들. 호스피스는 이들에게 현대의학만으로는 불가능한 안정과 평화를 제공한다.
양은경기자
key@ hk.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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