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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8)나주 복암리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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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8)나주 복암리 고분

입력
2002.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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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 가면 남으로 영산강을 끼고 펼쳐진 평야에 나즈막한 야산처럼 솟은 옛 무덤 무리를 만날 수 있다.‘칠조산(七造山)’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아 본래 7기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금은 4기만 남아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이 3호분으로, 영산강문화권 유적 정비계획에 따라 1996~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 합동으로 3단계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조사 결과는 발굴에 참여한 필자는 물론, 고고학계 전체를 들뜨게 했다.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한 고분에서 옹관묘, 목관묘,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 석곽옹관묘(石槨甕棺墓) 등 갖가지 형태의 무덤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한 변의 길이가 약 40m인 사다리꼴 모양의 고분에 무덤 41기가 3층으로 켜켜이 쌓인 독특한 구조로 3호분은 ‘아파트형 무덤’이란 별칭을 얻었다.

3~7세기 400여년에 걸쳐 조성된 이 고분은 맨 아래에 옹관묘가, 그 위로 석실묘 왕관묘 석곽묘, 맨 위층에 백제식 석실묘가 배치돼 있다.

묘제의 변천사는 물론, 영산강 유역의 토착집단이 백제에 편입되어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더없이 귀중한 사료이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토착 묘제인 옹관묘가 5세기 말~6세기 초의 대형 석실에 매납되어 있는 것은 이 지역 토착집단이 꽤 늦게까지 그 세력을 이어갔음을 짐작케 한다.

다양한 출토 유물들도 이들이 5세기 말~6세기 초까지 활발한 교역과 독자적 문화권을 유지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 발굴을 계기로 그동안 소극적으로 다뤄졌던 이 지역 토착집단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높아진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또 금동신발, 은제관식(銀製冠飾), 장식대도(裝飾大刀) 등 출토 유물들을 통해 백제-영산강 유역-왜(倭)로 이어지는 당시의 국제교류 및 역학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것도 값진 성과다.

발굴 과정에서 잊지 못할 일화도 많았다.

96년 집중호우 때 석실 틈새로 빗물이 쏟아져 아찔했던 일, 석실 연도가 좁아 옹관을 들어내기 어렵자 석공을 불러 톱날로 돌을 갈아내던 광경 등등….

취재 경쟁도 치열해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금동신발을 수습할 무렵 서울에서 온 한 기자가 밤낮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조사단원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기자를 따돌리고 서울로 유물을 운송, 보존처리에 들어갔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제가 이 지역을 손에 넣기 전 토착집단의 실체는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마한(馬韓)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시원스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이 집단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백제에 편입되어 갔는가 하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다.

복암리 3호분의 발굴 성과가 고대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에 풍성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

/윤근일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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