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막내 천수 보아라.힘든 합숙훈련을 끝내고 몇 달만에 집을 찾은 날도 “야 이놈아. 아픈데는 없지”란 욕 아닌 욕만으로 돌아서던 잔정 없는 아버지다. 편지란 것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쑥스럽고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95년이었던 같구나. 네가 아마 부평동중에서 운동할 때였지. 아버지가 20년을 일해오던 회사가 부도로 문을 닫고 우리 식구는 산 아래 셋방으로 이사했었지. 노조위원장이던 아버지는 다른 동료들 챙기느라 정작 퇴직금과 체불임금으로 900만원 받아들고 회사를 떠나야 했지.
그때 아버지는 네 엄마에게 “천수 운동 그만두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꺼낸 일이 있단다. 한달 20여만원 하던 합숙비도 우리 형편엔 너무 버거웠었다.
그때 네 형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엄마는 백화점에 취직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경솔함에 항의 했었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무대를 밟는 우리 막내 모습을 못 봤을 거란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섬뜩하다.
그때 그런 일도 있었지. “네 동료들은 보약이네 뭐네 먹어 가면서 운동하는데…”라고 아버지 노릇 못하는 미안함을 언뜻 비쳤을 때 너는 “밥 잘 먹는 게 보약이죠”라며 씩 웃고는 늦은 밤 또 공을 들고 나갔었지. 아버지는 그런 너의 등뒤에서 가슴으로 많이 울었다.
네가 지금 국가대표로 활약할 수 있게 된 데는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막내야. 혼자 잘났노라고 우쭐해 말고 항상 너를 도와준 주위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는 우리 막내에게 또 이런 말을 해주고 싶구나.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라고. 막내는 어려서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지. 운동장을 울면서 나오던 네 모습이 생생하다.
팀이 지고 있는 것을 보다못해 다리의 깁스를 부수고 운동장으로 뛰어들던 고등학교 적 일도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런 막내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성격에 무슨 일이나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이기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라는 것을 아버지는 너보다 좀 더 살아온 탓에 잘 알고 있노라고 얘기해주고 싶구나.
아버지는 우리 막내가 이번 월드컵대표팀에 발탁된 것 만으로도 엄청나게 기쁘다. 하지만 우리 천수가 큰일을 한번 냈으면 하는 욕심도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 개구쟁이 막내가 이렇게 되도록 도와준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빠는 이러 저러 하다 보니 우리 막내와 제대로 대화 한번 해본 적 없구나. 월드컵 끝나면 남자 대 남자로 술 한잔 하면서 밤새도록 얘기하자꾸나. 몸 건강하거라.
아버지가.
부친 이준만씨(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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