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YS)ㆍ김대중(DJ) 양 김 씨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버팀목 관계'였다.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쪽이 쓰러지는 날이면 나머지 한 쪽도 같은 운명이 되고 마는 정치적 불가분의 관계를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는 적어도 그들이 대권을 쟁취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혹독한 군사통치 시절 두 사람은 '외양상'으론 경쟁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암울했던 시대, 그들에게서 민주화의 희망을 보았고, 내일에 대한 확신을 갖기도 했다.
두 사람이 단합하면 새 세상을 열 것으로 믿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열광도 했다.
하지만 10 .26후나 87년 대선 등 결정적 시기의 분열은 이런 기대를 무산시킨 바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던' 3당 합당으로 YS가 먼저 권좌에 오를 수 있었고, 수평적 정권교체와 지역적 등권론으로 무장한 DJ역시 뒤를 이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입만 열면 그렇게 강조했던 '민주화 이후까지 협력' 다짐은 YS의 집권과 함께 용도 폐기될 수 밖에 없었다.
YS정부아래서 동교동계는 항상 권력의 지나친 견제와 탄압을 호소했고, YS의 '호의적 중립'속에 탄생한 DJ정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앙갚음 하듯 전 정권을 괴롭혔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오지 않을 다리를 건넌' 형국이 됐다.
시쳇말로 '아는 놈이 더 무섭다'는 경우다. 두 사람의 '남 잘되는 것은 못 보는' 끝없는 라이벌의식 탓이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양 김 단합론이 날개 짓 하다 주저앉았다. 역풍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수사(修辭)를 동원하든 본질은 양 김 세력의 연합론이요, YS-DJ 화해를 통한 대선 정국 세 불리기에 다름 아니다.
여권이 '신민주대연합'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까지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양 김은 물론 3김 청산을 요구하는 여론이 금방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한때 더블 스코어로 까지 일방적이던 노무현의 대 이회창 우세 여론이 겨우 오차범위 내에서의 박빙의 리드로 반전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YS를 비판해 왔던 노 씨가 상도동을 찾아 고개를 숙인,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났다.
부산시장 후보 추천권을 고리로 한 흥정이 명분 없는 야합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정도를 벗어난 정치는 이처럼 '문전축객' 신세가 십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풍(盧風)에 열광한 것은 그가 일신의 고난을 무릅쓰면서도 원칙과 명분을 지키려 했기에 가능했다.
시궁창이나 다를 바 없는 정치판에서 그래도 언행의 일관성을 유지해 온 노 씨의 곧은 지조와 기개가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노 씨측이 부랴부랴 신민주대연합 구상을 거둬들인 것은 냉정한 민심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그럼에도 아직 양 김은 물론 3김과의 연대를 위해 신경전을 벌이는 웃지 못할 일들 까지 벌어지고 있다.
영남 민심이 YS에 어떻다는 것은 이미 지난 총선에서 드러난바 있다. 민국당의 괴멸이 그 것 아닌가. DJ에 대한 호남 민심도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다.
이번 호남단체장 후보 선출 결과가 어땠는가를 보라. 현직 의원인 대통령 큰 아들이 미국에서의 요양을 중단한 채 서둘러 귀국해서 밀었던 목포시장 후보의 낙선이 웅변하지 않는가.
본인은 엄정중립을 지켰다고 우기지만 목포민심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통령 아들과 측근들의 곪아터진 비리로 심각한 아노미 상태다. 집권말기에 흔히 있어 온 그런 차원이 아니다.
때늦은 후회일 테지만 권력의 오만과 방종이 빚은 필연적 참사다. 정치적 사술로 돌파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럴 때 일수록 정도만이 해결의 첩경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더구나 정치판에 다시 양 김을 불러들여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연목구어(緣木求魚) 만큼이나 어리석을 뿐이다.
노 진 환 주필
jhr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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