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아’(옛 재무부의 영문 이니셜과 마피아를 합친 조어) 출신의 현직 국책은행장이라면 뻣뻣하고 융통성 없는 관료의 이미지부터 연상하게 된다.그러나 기업은행 김종창(金鍾昶ㆍ54) 행장을 만나면 이런 고정관념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30년간 재무부 이재라인을 두루 거친 전형적인 모피아 멤버이지만, 그는 오히려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사꾼’ 쪽에 가깝다. “이익을 못 내는 은행은 존재가치 조차 없다”며 입만 열면 수익성과 효율성을 외치는 평소 언사부터 그렇다. 취임한지 1년 만에 보수적인 기업은행을 상업은행 뺨칠 만큼 돈 잘 버는 국책은행으로 바꿔놓은 것도, 코스닥 시장에 ‘김종창 주가’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킨 것도 그의 남다른 ‘상술’이 뿌리다.
수익경영에 대한 그의 열정은 거의 신념에 가깝다. 국책은행의 위상에 맞게 공공성부터 강조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위의 비판에 대해서도 그는 정연한 논리로 반박한다. “공공성도 수익성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보장받을 수 있다. 은행이 결손을 내면 기업과 개인에 대한 금융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결국 국민 혈세의 낭비로 이어져 손실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된다. 공기업(국책은행)일수록 수익성의 확보가 더욱 절실한 이유다.”
수익경영의 성과는 각종 지표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환란 당시 거래기업들의 줄도산으로 한때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기업은행은 지난해 무려 4,5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내, 외환위기 이후의 손실을 단숨에 만회했다. 올해는 1ㆍ4분기에만 이미 지난해 이익의 절반인 2,250억원을 벌어 연 목표(7,000억원)의 초과 달성이 무난할 전망이다. 김 행장이 취임하던 지난해 5월 주당 3,000원에 불과하던 주가는 정확히 1년이 지난 현재 세 배나 뛰어올랐다. 말 그대로 ‘CEO 주가’의 위력이다.
김 행장에게 지난 1년은 국책은행 특유의 비효율적인 절차와 격식을 없애고 타성에 젖은 직원들의 의식을 개혁하는, 이른바 ‘벽을 허무는 과정’이었다. 직원들이 인정하는 대표적 개혁사례는 ‘전화 결재’. 웬만한 결재사항은 서면 보고를 완전 생략한 채 전화로 대체하도록 한 조치다.
김 행장 스스로 금리조정 등 중요사항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전화로 결재하기 시작하자 모든 부서에서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뿌리내렸다. 결재권자가 외부에 있을 땐 ‘핸드폰 결재’도 가능하게 했다. 덕분에 다른 은행 같으면 결재 도장 받는 데만 사나흘 걸릴 법한 일도 몇 분 안에 뚝딱 해결된다.반면 “업무처리는 전광석화처럼 빨라졌지만 담당자의 책임감은 한층 더 커졌다”는 게 김 행장의 평가.
널찍한 행장실을 직원휴게실로 개방하고 모든 임원의 수행비서제를 아예 폐지한 것, 행내에서 ‘중소기업’이란 관용어를 친근감 넘치는 ‘파트너기업’으로 바꿔 부르기로 한 것 등도 변화의 단면들이다.
요즘도 사내 인트라넷의 ‘CEO와의 대화’ 코너를 통해 수시로 직원들과 의견을 나누는 김 행장은 “서비스업은 무엇보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며 “특히 ‘내부 고객’인 직원들의 가치를 높이지 못하는 은행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전 회장이 평소 강조한 ‘격식 파괴(Informality)’를 제일 중요한 경영덕목으로 삼고 있다는 그는 틈만 나면 전국의 일선 지점을 방문, 간부를 제외한 말단 행원들과 회식을 갖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등 CEO와 직원 사이의 ‘벽’을 깨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업점장의 여신 전결권을 최고 20억원으로 확대하고, 기능 위주로 단순하게 분리돼 있던 기존의 은행조직을 고객 중심의 사업본부제로 대대적으로 개편하기 시작한 것도 직원들의 책임과 권한, 역량을 높이기 위한 CEO의 배려다. “지난 1년이 전 직원과 함께 개혁의 토대를 다진 기간이었다면 앞으로는 개혁의 결실을 일궈내는 데 더욱 힘을 쏟을 것”이라는 김 행장이 진두지휘하는 ‘조용한 개혁’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김종창 행장은
1948년 경북 예천
1970년 서울대 상학과 재학중 행시 8회 합격
1990년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1996년 재경부 국민생활국장
1998년 금감위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
2000년 금감원 부원장
2001년 중소기업은행장
가족관계 및 취미
-부인 권성자(51)씨와 2녀.
-등산,골프 핸디18,소주 한 병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기업은행은
1961년 특별법에 의해 자본금 2억원의 중소기업 전담은행으로 출범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정부가 1조9,000억원을 출자, 정부투자기관에서 출자기관으로 전환됐다. 현재 지분은 정부 51.0%를 비롯해 한국투자신탁증권 16.5%, 한국수출입은행 15.9%, 한국산업은행 12.5% 등으로 구성돼 있다.
총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현재 59조8,553억원. 올해엔 자산규모 70조원, 당기순이익 7,000억원을 목표로 세워놓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은 국내 은행 중 가장 높은 수준인 10.9%. 이 같은 영업 호조에 힘입어 올들어 신용등급(무디스)이 ‘Baa2’에서 ‘A3’로 두 단계나 뛰어올랐다. 지난달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은행권에서 가장 낮은 금리(리보+0.18%)로 10억 홍콩달러(약 1,675억원)를 차입하는데 성공, 주목을 받았다.
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코스닥에 등록돼 있으며 올해 안에 증권거래소로 이관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5월 김종창 행장 취임 후 창사이래 처음으로 기업설명회(IR)를 개최하는 등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익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국에 380개의 영업점이 있으며 직원수는 6,400여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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