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공을 차는 장면이 나온다. 삼국유사는 이를 축국(蹴鞠)이라고 적고 있는데 글자 그대로 공을 찬다는 뜻이다.일본의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서기 644년 나카노오에(中大兄) 왕자가 당시 수도였던 나라의 법흥사 앞에서 다른 왕자들과 공을 차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는 이를 타국[打 + (毛+)] 이라 적고 있는데 역시 공을 찬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두 기록은 모두 공을 차는 것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축국을 계기로 김춘추의 처남이 된 김유신은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김춘추를 지원해 신라의 제29대 태종 무열왕으로 만든다.
일본의 나카노오에 왕자는 자신의 헛발질로 허공에 뜬 신발을 받아 바친 호족 나가토미노(中臣鎌足)와 동맹을 맺는데 이들은 645년 왕실을 좌지우지하던 백제계 호족 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를 태극전 앞에서 주살하고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다.
이를 대화개신이라 부른다. 나카노오에가 정권을 잡자 김춘추는 왜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딸과 사위를 전사케 한 백제를 칠 군사지원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김춘추는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다. 나카노오에는 663년 2만7,000여명의 백제구원군을 보내 지금의 금강 하구인 백강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축구가 계기가 되어 왕위에 오른 두 왕자의 대결은 김춘추의 승리로 끝맺는다.
그런데 가장 약소국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는 당나라를 끌어들인 김춘추의 외교전략이 큰 역할을 했지만 신라 고유의 화랑도가 더 결정적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화랑들이 살신성인함으로써 역전시키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고 있다.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은 황산벌에서 계백에게 패하자 아들 반굴에게 화랑정신을 요구했고 반굴은 서슴없이 단기로 백제군의 진지로 달려갔다.
반굴의 죽음을 본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에게 같은 길을 요구하자 그 역시 단기로 달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두 장수의 아들이 눈앞에서 전사하는 것을 목도한 신라군사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 것은 당연했다.
2002 FIFA 월드컵의 16강 진출에 대한 염원은 뜨겁지만 객관적 전력은 16강이 버거워 보인다. 화랑도의 신라가 자신보다 강한 두 상대를 꺾었던 것처럼 우리 대표팀이 강팀을 꺾고 16강 혹은 8강에 진출할 수는 없을까.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반굴과 관창이 황산벌 전투에서 보였던 불굴의 화랑도 정신을 월드컵 경기에서도 발휘해주길 기대한다. 필자의 어린 시절 우리 국가대표팀을 화랑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새로운데, 현재 국가대표팀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다. 붉은 악마인가?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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