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첫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 속에서 나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살포시 내려뜨고 있다. 한 장 찍어줄까? 라고 나는 그에게 물었던 것 같다. 싫다고는 했지만 그날 그의 사진을 1장 찍어둘걸, 하는 후회가 된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갑자기 헤어져버렸다. 지금은 더 이상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코끼리를 찾아서’ 에서)조경란(33)씨의 소설의 힘은 감정의 섬세한 변화를 살그머니 내보이는 데서 나온다. 고도의 언어 밀도를 요구하는 단편에서 그의 힘은 강하게 발휘된다.
평론가 김병익씨는 이 힘을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 속에, 마치 짧은 스웨터 틈으로 살짝 보이는 배꼽처럼 그 모습을 가림으로써 비밀스레 드러내는 진정한 주제라는 것을, 그것이 우리를 감응시킨다는 것을 방법적으로 제시해준다.”
조씨가 세번째로 낸 창작집 ‘코끼리를 찾아서’(문학과지성사 발행)에서 이 ‘비밀스레 드러내는 진정한 주제’를 찾아낼 수 있다.
창작집에 실린 7편의 중ㆍ단편은 대개 ‘갇힌 인물’을 그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김영희가 흘린 눈물 한 방울’에서 그림 그리는 여자 김영희는 단독주택을 빌려 혼자서 살아간다.
‘마리의 집’ 주인공 장말희는 아프리카미술관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외롭게 지낸다. 자폐적인 사람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작품도 있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수강생들이 각자 품고 있는 사연을 털어놓는 이 작품의 제목은 ‘우린 모두 천사’이다. 고독한 사람들이 모두 ‘천사’라니, 지독한 냉소다.
이 인물들에 대한 조씨의 묘사는 그러나 경쾌하다. 작가는 마땅히 갑갑하고 우울해야 할 사람들을 경쾌하게 형상화한다.
도무지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발랄하게 표현한다. 이런 식이다.
“그러나 김요옥은 한 번도 네온 남자에 관해 이미란에게 말한 적이 없다. 네온 남자에게 그의 아내에 관해 물어본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김요옥은 적들로 가득 찬 숲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무처럼 위장하거나 살짝 피하거나 움츠리거나 납작 엎드리는 방법을 터득한 작은 야생 동물들을 기억해낸다. 죽은 나무에 움푹 파인 구멍에 숨는 방법도 있지.”(‘우린 모두 천사’에서).
조씨가 ‘스웨터를 들어올려 보여주는 배꼽 같은’ 진실은 이 같은 묘사의 힘에서 찾아진다.
무엇보다 조경란씨의 주제의 진정성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고백할 때이다. 자전소설 ‘코끼리를 찾아서’에서 그는 옥탑방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 이야기를 한다.
헤어진 애인이 사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안고 자다가 잠결에 셔터를 눌렀다. 사진에는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가 찍혀 있었다.
슬픈 일이 생기면 코끼리에게 얼굴을 파묻고 울기로 한다. 작가는 고독한 코끼리로 상징되는 ‘무엇’에게 속내를 소곤소곤 털어놓기로 한다. 그것은 작가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무엇’일 것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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