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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 안락사 논쟁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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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 안락사 논쟁 어디까지 왔나

입력
2002.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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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9일 영국의 43세 동갑내기 전신마비 여성 2명의 운명이 엇갈렸다.3월에 영국 고등법원으로부터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인정받은 미스 비라는 여성이 인공 호흡기를 뗀 지 20여일 만인 이날 평화롭게 숨졌다. 반면 남편의 도움을 받아 자살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다이앤 프리티라는 여성의 요청은 유럽 인권재판소에서 거부당했다.

영국 형법상 자살을 도울 경우 최고 14년형을 받는다.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를 포기하는 ‘소극적 안락사’를 택한 여성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찾았고, 약물 등을 이용해 억지로 목숨을 끊는 ‘적극적 안락사’를 원한 여성은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은 다 의식이 남아있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외국과 국내에서 안락사 논쟁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안락사의 허용 범위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허용 여부로 좁혀지는 추세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법적 윤리적으로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다.

이탈리아 그리스 노르웨이 한국 등 안락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나라에서도 본인이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소극적 안락사를 묵인하는 경우가 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퇴원시키는 예가 그것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합법적으로 적극적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는 곳은 네덜란드와 미국 오리건주뿐이다. 오리건주는 주민투표로 1994년 안락사 허용 법안을 제정, 1998년 3월 극약을 탄 브랜디를 마시고 숨진 말기 유방암 환자가 합법적인 첫 적극적 안락사자로 기록됐다. 네덜란드는 올 4월 의학적 윤리적 테두리 안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안락사법 시행에 들어갔다.

안락사 지지자들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강조한다. 생명권은 생명을 물리적으로 연장할 권리가 아니라 생명의 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는 논리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운운하며 극심한 육체적ㆍ정신적ㆍ경제적 고통을 참아낼 것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인정한 대부분의 나라가 소극적 안락사는 인정하되 적극적 안락사를 제외하는 것은 윤리적ㆍ법적으로 죄악시되는 자살과 살인의 요소가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한 생명 연장 기술이 없었다면 죽음에 이를 불치병 환자를 방치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환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치료를 규정한 의사 윤리의 관점에서도 가혹한 고통을 치유한다는 의미에서 소극적 안락사는 부분적인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적극적 안락사의 경우 환자를 사망케 하는 의도적 행위가 개입함으로써 자살 방조, 살인 혹은 촉탁 살인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1998년 미국의 병리학 박사 잭 케보키언은 미국 CBS 방송에 말기 루게릭병 환자에게 극약을 직접 주사해 안락사시키는 장면을 방영케 해 2급 살인 혐의로 10~25년형을 선고 받았다.

1990년 이후 극약이 자동으로 투입되는 장치를 이용해 130명을 안락사시킨 데 대해서는 모두 무혐의 처리됐던 것과 대조된다. 이후 적극적 안락사 및 유죄 여부 판별 기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현재 세계적으로 적극적 안락사가 불법으로 규정돼 있지만 윤리적 의학적으로 타당한 범위 내에서 적극적 안락사를 시행한 의사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거나 경미한 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의미 없는 목숨의 억지 연장이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는 현실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생명 경시 풍조를 우려하는 안락사 반대자들은 여전히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죽어야 하는 의무’로 변질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한 단계 더 나아가 노년층이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권리로서의 안락사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다. 지난해 네덜란드에서는 건강한 86세의 전직 상원의원의 안락사를 도운 의사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최근 민주66정당이 건강하지만 죽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에게 자살 약을 사용할 수 있는 법의 제정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환자는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죽음의 약을 주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를 ‘잘 죽이는 것’이 의사의 새로운 업무가 되리라는 전망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우리나라의 경우

우리나라도 더 이상 안락사 논쟁의 ‘무풍지대’가 아니다.

사회적 공론화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안락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다. 임종을 집에서 맞겠다는 것이나 경제적 사정으로 가족과 병원의 동의 아래 말기 환자를 퇴원시키던 관행 자체가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안락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는 1997년 12월 이른바 ‘보라매 병원 사건’이다. 당시 서울 보라매병원의 의료진은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환자를 “치료비가 없으니 퇴원시켜 달라”는 부인의 요구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뗀 채 퇴원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들에 대해 법원이 “회복기의 환자를 퇴원시켜 죽음을 방조했다”며 유죄를 선고하자 의료계가 “회복 가능성의 기준이 무엇이냐”며 반발해 사회적 논란으로 비화했다.

이 판결의 영향으로 그후 의료 현장에서는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퇴원을 요구하는 가족과 이를 거부하는 의사 간의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나 안락사 인정에 대한 논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돼 왔다.

법원은 올 2월 항소심 선고에서도 의료진에게 유죄를 확인하면서 “치료 중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말기 환자에 대해서만 의사의 양심적 결단에 따라 허용돼야 하며 그 범위와 방법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5일 대한의사협회는 ‘임종환자의 연명 치료 중단에 대한 의료윤리지침’을 논의하고 있다고 발표해 다시 한번 안락사 논쟁에 불씨를 당겼다.

이는 지난해 11월 의협이 발표한 윤리지침 중 ‘회복불능 환자의 치료중단(30조)’의 내용을 더욱 보강한 것이다. 지침 시안은 ‘임종환자’ 또는 가족이 원하면 적절한 조건 아래 진료를 중단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법과 상치된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안락사 관련 일지

1935 영국 안락사협회 창설.안락사 합법화 위한 조직적인 운동 시작

1970 미국 뉴욕 의사회 소극적 안락사 지침서 발간

1971 네덜란드 검찰 안락사 시술의사 불기소방침 결정

1975 미국 카렌 앤 퀸란 사건.안락사 입버화 운동 확산

1978.11월 샌프란시스커 선언 소극적 안락사 정착

1994 미 오리건주 세계 최초 안락사 허용 법안인 존엄사법 통과

1996.7월 호주 노던 테리토리주 세계 최초 안락사법 시행

1997.3월 호주 연방의회 안락사 금지 법안 채택.노던테리토리 주법 폐기

1997.10월 미 대법원 오리건주 존엄사법 합헌 판결

1998.3월 미 말이 유밤암 환자가 합법적인 첫 적극적 안락사로 기록

1998.11월 미국 CBS방송 루게릭병 말기 환자 안락사 장면 방송.적극적 안락사 논란 확산

2001.4월 네덜란드 상원 안락사 허용 법안승인.안락사 허용 최초 국가

2002.3월 영국'미스비'법원에 인공호흡기 제거 요청 소송 승소

2002.4월 네덜란드 안락사법 시행

2002.4월29일 유럽 인권재판소 영국 다이앤 프리티의 적극적 안락사 불허 판결.미스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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