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혼돈은 이 세상이 생기기 위한 조건이었다.그렇다면 혼돈에서 어떻게 이 세상이 탄생한 것일까. 세계의 신화를 보면 대체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절대자에 의한 창조. 히브리 신화가 이를 대표한다. ‘창세기’에 의하면 야훼 하느님이 맨 처음 하늘과 땅의 영역을 갈라 놓은 후 엿새에 걸쳐 세상을 창조한다.
두 번째는 혼돈에서 거인이 생기고 이 거인의 죽음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바빌론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거인 티아맛은 마르둑을 비롯한 젊은 신들에 의해 살해당한 후 절단되어 하늘의 해 달 별 등 천체와 땅의 강과 언덕 등으로 만들어진다.
인도신화에서는 거인 뿌루샤가, 게르만 신화에서는 거인 이미르가 각기 다른 신들에게 살해당한 후 그 몸이 하늘과 땅의 각 요소로 바뀐다.
중국신화에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다. 태고의 중국은 결코 오늘처럼 한 나라가 아니었고 수많은 민족이 넓은 대륙에서 각자의 독특한 문화를 지닌 채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창조신화도 여러 가지가 섞여있다.
우선 ‘회남자’(淮南子)는 히브리 신화와 비슷한 세상 창조의 이야기를 전한다. 흐릿한 혼돈 상태가 지속되다가 그 속에서 홀연히 두 명의 신이 나타났다.
이 신들은 제각기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에는 크게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의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어딘지 짐작이 가지 않던 혼돈 상태가 걷히고 동서남북 등 여덟 곳의 방향이 분명해졌다. 세상은 이렇게 창조되었다.
‘회남자’의 이야기는 신에 의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히브리 신화와 비슷하긴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큰 차이가 있다.
창세기의 야훼 하느님은 혼돈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회남자’의 두 신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혼돈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신화에는 절대적인 창조주란 없다.
혼돈으로부터 이 세상으로의 변화는 어떤 신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自然)’된 것일 뿐이다.
그러면 바빌론 신화와 비슷한 세상 창조의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중국신화에서 사실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창조신화, 즉 반고(盤古) 신화가 이제 등장할 차례이다.
반고신화는 유비(劉備) 조조(曹操) 손권(孫權) 등이 패권을 겨루었던 삼국시대(220∼280) 무렵 오(吳) 나라의 학자 서정(徐整)이 지은 ‘삼오역기’(三五歷記)와 ‘오운역년기’(五運歷年記)라는 책에 실려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두 책은 이미 없어졌고 송(宋) 나라 때 편찬된 백과전서인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청(淸)나라 때 마숙(馬 )이 지은 ‘역사’(繹史)에 두 책의 일부 내용이 인용됨으로써 반고신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다.
반고는 중국 태초의 거인이다. 그는 어떻게 오늘의 세상을 지어냈는가?
태초는 혼돈상태로 마치 달걀 속과 같았다. 노른자와 흰자가 한데 들어 있는 것처럼 아무 분별도 없던 시절이었다.
반고는 그 속에서 태어났다. 마치 달걀 속의 병아리처럼 혼돈이 반고를 품어 낳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1만 8,000년이 지나자 하늘과 땅이 열리기 시작했다.
밝고 맑은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어둡고 탁한 기운이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된 것이다. 반고는 그 가운데에서 빠르게 변해갔다. 하늘이 날마다 1장(丈)씩 높아가고 땅이 날마다 1장씩 두터워 질 때 반고도 날마다 1장씩 키가 커졌다.
이렇게 다시 1만 8,000년이 흘렀을 때 하늘은 지극히 높아졌고 땅은 지극히 낮아졌으며 반고는 지극히 키가 커졌다. 마침내 하늘과 땅은 9만리나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높아진 하늘과 낮아진 땅 사이에 거인 반고는 우뚝 서 있었다.
다시 세월은 흘러가고 반고도 나이를 먹어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결국 반고의 그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죽은 반고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숨결은 바람과 구름이, 목소리는 우레가 되고, 왼쪽 눈은 해가, 오른쪽 눈은 달이 되었다.
그뿐인가. 손과 발은 사방의 명산이 되고, 피는 강물이, 힘줄은 길이, 살은 밭이 되었다. 정말 온몸 구석구석이 다 변화하였다.
머리털과 수염은 별이, 몸에 난 털은 초목이 되고, 이와 뼈는 쇠붙이와 돌로, 골수는 보석이 되었으며 그가 흘렸던 땀조차도 비와 호수로 변하였다. 오늘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이처럼 거인 반고의 주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거인의 몸이 변화하여 천지 자연을 이룩한다는 이야기를 신화학에서는 거인화생설(巨人化生說)이라고 부른다.
학자들 중에는 반고신화가 바빌론 등의 거인신화와 닮은 점이 많은데다가 ‘산해경’(山海經)과 같은 오래된 신화집에서 보이질 않고 훨씬 후대의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신화가 서방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설사 전래되었다 하더라도 신화는 그것이 뿌리를 내린 지역의 풍토와 문화에 맞게 다시 이야기되기 마련이다. 반고신화는 바빌론 등의 거인신화와 표면상 비슷해 보이지만 속 내용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반고의 신체변화는 자연사에 의해 이루어진데 비하여 티아맛 등은 다른 신의 살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첫 번째 차이이다.
중국신화는 혼돈에서 거인으로, 다시 거인에서 세상이 저절로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지만 인도신화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서구 신화는 ‘최초의 희생’에 의해 세상이 탄생되었다고 믿는다.
창조신화는 원시 인류의 우주와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관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양 세계에서는 천지만물의 근원인 태극(太極)에서 음양(陰陽)의 두 가지 기운이 생겨나고, 이 기운이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다섯 가지 기운 이른바 오행(五行)을 낳고 다시 이 기운들의 조합에 의해 만물이 생겨난다는 관념이 일반적이다.
반고신화의 첫 머리에서 태초는 달걀 속과 같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태극이 마치 노른자와 흰자가 있는 달걀의 속 모습과 닮은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태극과 달걀은 둘 다 생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동양 세계에서는 이처럼 자연발생의 원리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서구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생각보다도 외부의 충격이나 반대의 힘에 의해 변화, 발전이 생긴다는 이른바 변증법적 관념이 지배해왔다.
가령 마르크스는 식민지 상태에 놓인 인도의 불행에 대해 깊이 동정하면서도 ‘미이라가 들어 있는 관이 깨져야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듯이’ 인도의 발전을 위해서는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침입이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서구 학자들이 동양 근대사를 설명할 때 단골로 써먹었던 ‘충격_반응_근대화’의 도식 즉 서구문명의 충격에 의해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 동양사회가 근대화되었다는 논리도 바로 이러한 변증법적 세계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화학자 브루스 링컨은 서구 거인신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가해자인 신들이 살해된 신의 신체를 ‘절단’ 혹은 ‘분리’하는 행위를 들었다.
반면 반고신화에서 신체 변화는 ‘통째로의’ 상태에서 제각기 이루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서구의 분석적, 논리적인 사고방식과 동양의 통합적, 상관적인 사고방식의 싹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고신화의 신체화생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원시 인류가 인간의 몸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대우주인 자연과 소우주인 인체가 서로 감응하는 상동(相同) 관계에 있다는 생각은 고대 동서양의 인류가 다함께 지녔던 관념이었다.
그런데 이 오래된 관념이 동양에서는 서구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근대에 가까운 시기까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 명의 허준(許浚)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인체의 혈액을 지하수에, 모발을 초목에, 이를 쇠와 돌에 비유하고 있으며 청나라 때에 그려진 인체 그림인 ‘내경도’(內經圖)에서는 산과 들, 숲 등의 자연으로 인체의 각 부분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신체는 단순하지가 않다. 그것은 자연의 정신이 투영된 또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최근 생태학 분야에서 관심을 끌었던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설’ 역시 이러한 인체와 자연의 동일시 관념에 근거하여 지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간주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고자 했다.
우리의 몸은 요즘 많이들 얘기하듯이 무슨 욕망의 주체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주와 인간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통로이자 양자가 복잡하게 얽혀진 존재이기도 하다.
거인 반고는 지금 어디 있는가. 그는 눈앞에 보이는 저 산과 들에도 있고, 내 몸의 혈맥 속에도, 심장 속에도 있으리라. 우리가 그를 부르면 그는 언제든 현신(現身)할 터이다.
●'화남자'(淮南子)란
고대 중국의 사상서,전한 시기의 제후였던 회남왕 유안(기원전 179?~122)이 그의 문객들과 더불어 지은 책이다.노장 사상 및 신선술을 중심으로 그때까지 유행하였던 여러 사상들을 종합하였다.한대 이전의 신화,전설을 많이 담고 있어 당시의 신화 종교 민속 등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책이다.국내에는 이석호 교수의 역주본(을유문화사 발행·1972)이 나와있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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