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는 인류역사 이래 한 시도 끊이지 않고 계속돼온 자기표출행위다.문자가 발명되면서 낙서는 더욱 성해졌지만,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동굴벽화도 일종의 낙서였다. 인간은 낙서를 하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낙서를 통해 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을 남긴다.
낙서를 보면서 후세사람들은 역사를 알게 되며 과거의 인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낙서의 효용가치는 아주 큰 셈이다.
■최근 중ㆍ단편 소설전집을 낸 작가 최인호씨는 자신의 문학인생을 정리하면서 "제 4기로 접어든 이제부터는 재미있고 좋은 글을 쓰겠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쓰고 싶은 게 있으면 잠언이든 콩트든 형식을 가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쓸 글에 대해 '건전한 의미에서의 자기낙서'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피카소도 노년시절에 장난 삼아 춘화를 그렸다고 말했다. 요절한 미국의 흑인 천재화가 장 미셸 바스키야(1960~1988)의 예술도 시작은 뉴욕의 거리와 지하철을 캔버스로 삼은 스프레이낙서였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낙서는 공해일 뿐이다.
'의지의 한국인들'은 스위스 융프라우의 동굴벽이건 담양 소쇄원의 왕대나무건 서울 남산의 봉수대건 가리지 않고 이름을 새긴다.
금강산의 수려한 바위에 빨갛게 음각된 거대한 김일성어록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한국인들만이 극성스러운 낙서족인 것은 아니다.
녹색연합은 주한미군들이 청계산등 서울 근교의 네 산에 페인트와 스프레이로 어지럽게 해놓은 낙서를 고발했다.
사진으로 보면 미군의 영문 낙서는 장난이 아니라 환경파괴작업처럼 보였다.
■1816년 북한산에서 진흥왕 순수비를 최초로 발견한 추사 김정희는 비석의 측면에 자신의 답사사실을 새겨 넣었다.
추사가 아니었더라면 그것도 문화재를 훼손하는 흔한 낙서에 불과했을 것이다.
옛 그림의 옆에 씌어 있는 배관기(拜觀記)나 소장자의 감상문 따위도 실은 낙서일 수 있지만, 그런 글이 붙어 있어서 문화재는 더 빛이 난다.
그러니 역사에 이름이 남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사람만 공공의 자연물에 낙서를 할 일이다.
범인(凡人)들의 무분별한 낙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의미있는 금석문이 될 수 없다.
임철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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