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제76포로 수용소를 시찰하던 중 포로들에게 납치ㆍ감금됐다. 거제도 포로 폭동사건의 시작이었다.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뒤 공산군 포로가 급격히 늘자 정부와 유엔군은 그 해 11월17일 거제도에 360만평 규모의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이 시설에는 인민군 15만, 중국군 2만,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등 최대 17만3천명이 수용됐다. 당시 거제도에는 포로 이외에 주민 10만 명과 피난민 15만 명 등 모두 42만여명이 거주했다.
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 사이에 반목이 있었다. 이 갈등은 미군이 1949년 제네바협약의 자동송환 원칙을 무시하고 포로들이 본국 귀환을 포기하도록 협박, 고문하면서 증폭했다.
공산 포로들은 미군의 포로 심사에 격렬히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수용소에서는 1952년 이후 크고 작은 폭동이 줄을 이었지만, 그 해 5월7일에 시작된 폭동이 규모도 크고 기간도 긴데다 수용소장 납치ㆍ감금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겸하고 있어서 보통 거제도 포로 소요사건이라고 하면 1952년 5월 폭동을 가리킨다.
도드 준장을 납치한 공산 포로들은 처우 개선, 전원 본국 송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석방조건으로 내걸었으나, 미군은 이를 거부하고 발포해 포로 70여명이 죽고 14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이 때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기 시작한 6월10일 사이에 미군이 지원하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들의 충돌로 150여명이 사망했다.
도드 준장은 납치된 지 나흘 만에 미군의 잔학행위를 인정하고 석방됐다. 거제도 수용소는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2만7,389명이 석방되고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폐쇄됐다.
고종석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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