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2000년 4ㆍ13 총선 직전 진승현(陳承鉉) MCI코리아 부회장을 직접 만나 “국가를 위해 돈을 써달라”며 자금제공을 요청했던 것으로 3일 밝혀졌다.또 엄씨는 같은 해 3월 진씨에 대한 신원조사 및 정보수집에 나서고 수 차례 전화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나 국정원의 총선자금 모금 의혹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진씨는 검찰조사에서 “2000년 4월 초 서울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19층에서 일본인 2세 다나까씨의 소개로 엄 전 차장을 만났다“며 “엄 전 차장은 ‘사람이 사업을 해서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국가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달라’고 제의했다”고 밝혔다.
진씨는 또 “이에 앞서 3월 중순께 국정원이 내 신원조회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지인을 통해 사정을 알아봤다”며 “며칠 뒤 엄 전 차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직원을 보내 다시 조사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고 말했다.
엄씨는 얼마후 진씨에게 “전과가 있는 40대 동명이인으로 잘못 조사가 됐다. 미안하니 언제 한번 보자”고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엄씨는 암투병으로 업무를 보지 못하게 되자 측근인 정성홍(丁聖弘) 전 과장에게 진씨를 만나 특수사업 자금을 모집할 것을 지시했다.
또 이 시기에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과 김방림(金芳林) 의원, 허인회(許仁會)씨 등도 진씨의 정치자금 5,000만원씩을 전달 받아 여권 핵심부와 국정원이 벤처업체를 상대로 계획적으로 총선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진씨는 검찰에서 “엄 전 차장이 나를 국정원이 추진중인 사업에 참여시킬 목적으로 직접 해명전화를 하는 등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말해 자신이 국정원의 자금 조달창구로 이용됐음을 시인했다.
실제로 진씨는 정씨에게 “젊은 나이에 돈을 많이 벌었으니 국가를 위해 사용하고 싶다”고 말했고 정씨는 즉석에서 “김홍일(金弘一) 의원에게 1억원을 전달하러 가자”고 제의했다.
김은성(金銀星) 전 차장도 “‘진이 사업을 많이 지원했으니 지속 활용하려면 한번 격려하라’고 정 과장이 건의해 진씨에게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니 고맙다’고 말했다”고 진술, 국정원이 벤처자금 모금에 조직적으로 나섰음을 내비쳤다.
한편 진씨에 대한 국정원의 신원조사 20여일 뒤인 4월 중순 사직동팀도 신광옥(辛光玉) 당시 민정수석의 지시로 진씨와 MCI코리아에 대한 신원조사를 실시, 여권 핵심실세가 진씨를 총선자금 조달창구로 이용하기 위해 양 기관을 동시에 활용했다는 의문도 커지고 있다.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진씨에 대한 조사는 범죄혐의 파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씨와 MCI코리아에 대한 정보수집 차원이었다”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박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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