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 장군이 어떻게 수(隋) 나라 30만 대군을 무찌를 수 있었을까.수의 100만 대군이 10분의 1도 못 되는 고구려 군대에 궤멸 당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초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단편적인 지식이 못내 의심스러웠다.
청천강 상류에 보를 막았다가 수 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널 때 터뜨려 정예군 30만을 몰살시켰다는 살수대첩(薩水大捷)이란 민족적 자긍심 고취를 목적으로 부풀린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다.
뒷날 독서를 통해 그것이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음을 알고 그런 의심을 품었던 일이 죄스러웠다.
근래 이덕일의 '오국사기'를 읽고부터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깨닫게 되었다. 고구려 정벌이란 숙원을 풀기 위해 수 양제가 동원한 전투부대 병력은 정확히 113만 3.800명이었다.
보급품 수송을 맡은 후방 지원병력까지 치면 300만 명이 동원되었다니,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 병력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양제는 이 전쟁을 위해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 수로를 뚫었다. 병력과 물자수송을 원활히 하려는 목적이었다.
치밀한 전쟁준비와 훈련에 국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지만 결과는 무참한 패배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출정시기를 잘못 잡아 날씨와의 싸움에서 졌고, 보급로가 멀고 험했던 것도 중요한 패인이다.
고구려 영양왕의 지략이 뛰어나고 을지문덕 같은 용장이 있었던 것도 그렇지만, 결정적인 패인은 권력이 제왕 한 사람에게 집중된 수 나라의 경직된 시스템이었다.
양제는 일선에서 전쟁을 지휘하면서 장수들에게 모든 전진과 후퇴는 자신의 허락을 받도록 엄명을 내렸다.
어렵게 요하를 건넌 수군은 고구려의 요동성 공략에 성공해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행위는 재가를 받으라는 어명을 의식한 장수가 항복 수락여부를 묻기 위해 전투를 중지하고 황제에게 보낸 사자를 기다리는 사이, 고구려 군은 전열을 정비해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황제를 만나는 절차가 번거로워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공격을 재개해 고구려 진영에서 백기가 오르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몇 달이 흘렀다.
양제의 행재소(行在所)는 글자 그대로 움직이는 궁전이었다. 황제와 수행원 수 백 명이 머무르는 거대한 지휘대 밑에 수레바퀴를 달아 움직이게 하였다.
숙영할 때는 행재소 주변에 이동식 성벽이 둘러쳐졌는데, 그 길이가 3km였다 하니 사자의 황제알현 절차를 알만하지 않은가.
평양성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바닷길로 대동강 하구에 도착한 수군은 육군의 도착을 기다려 합동작전을 하라는 황제의 명령 때문에 시간을 허송하며 군량만 축 냈다.
"모든 병사는 100일분 식량을 지고 가라"는 황제의 명령 한 마디에 노무자로 변한 주력부대 30만 명이 평양성 밖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강병도 정예군도 아니었다.
병기와 기본 보급품을 휴대하기도 벅찬 판에 100일분 식량을 지고 강행군을 거듭했으니 사기가 어떠했겠는가.
"여기서 철군하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에 입조(入朝) 하겠다"는 을지문덕의 제안을 명분 삼아 원정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그 때를 기다려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통쾌한 수공작전을 전개해 청사에 남은 위업을 달성했다.
권력집중 제도의 폐해가 비단 전쟁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정권 말기면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집사장과 비서관들이 줄줄이 오랏줄에 묶여가지를 않나, 가신이란 사람들이 같은 신세로 전락하는 것도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란 용어부터 바꾸자는 논의가 나올 정도로 제왕적 대통령 제도의 문제점이 커졌다.
선거에만 정신을 팔 것이 아니라, 대통령 권력의 분산을 포함한 시스템 개선에 중지를 모을 때가 되었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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