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스스로를 ‘한국경제에 대한 낙관론자’라고 정의했다. 환란으로 ‘망국론’이 판을 치던 때도 ‘우리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충전과정’이라는 확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다.“지난 40년 한국경제를 필름에 담아보면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라며 우리 경제 발전과정에 희망과 굳은 믿음을 갖고 있는 그가 한국은행 총재로 취임한지 만 1개월이 지났다.
취임 초기부터 직설적이고 솔직한 화법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박 총재는 ‘역사적’ 관점에서 정책결정에 임하고 외부의 압력과 이해관계를 초월해 중앙은행 총재직을 수행할 것이지만 정부와의 조화로운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임기간 중 중앙은행을 한국 최고의 인재집단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뢰 받는 기관으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대담= 배정근 경제부장≫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한은에서 시작했는데, 26년만에 돌아와보니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내가 입행했던 때(1961년)에는 한은맨들이 굉장한 긍지를 갖고, 경제정책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 직원들이 그때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직원들이 높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직장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각종 강연에서 올해를 ‘선진국형 경제 성장의 원년’으로 표현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과거 40년은 저임금, 차입성장, 보호주의, 정부주도 등 구질서 속에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했다면 환란은 구시대가 끝났다는 환경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환란 후 4년간은 고임금, 내실성장, 세계화, 시장주도라는 신질서로 전환하기 위해 ‘성장엔진’을 바꿔 다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부실기업이 생겨도 금융시스템이 꿈쩍도 하지않습니다. 선진형 경제는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 목표입니다.
정부주도형 경제가 시장경제로 바뀌면서 재정보다 금융이 중요시되고, 이에 따라 중앙은행의 위상도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최근 발표된 4월 수출실적, 3월 산업활동동향 등을 볼 때 현 경기를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현재 우리 경제는 경기회복기인 동시에 후진국형 성장에서 선진국형 성장시대로 전환하는 시발점에 서 있습니다. 경기회복은 초기 단계입니다.
경기변동론에 따라 부동산ㆍ주식시장이 가장 먼저 회복됐고, 이제 제조업 생산과 수출이 살아나고 있으며, 2ㆍ4분기 후반이나 3ㆍ4분기에는 설비투자가 따라올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경제가 풀려가고 있다고 봅니다.”
-5월 콜금리 결정이 7일로 예정돼있는데, 최근의 미국의 증시침체, 하이닉스반도체 매각 무산 등이 경기판단에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십니까.
“하이닉스는 한국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금융권에 8조원의 부채가 있지만 모두 대손충당금을 쌓아놓은 상태라 하이닉스로 인해 타격 받을 은행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 증시침체도 일시적인 현상으로, 경기가 잠시 회복 후 재차 둔화되는 더블 딥(double-dip) 우려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환란을 거치면서 복원된 금융시스템과 1,000억달러대 외환보유고가 금융 한국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콜금리를 5월에 올리거나, 6월에 올리거나 시장에 미치는 효과에서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많습니다. 이미 시장에서는 금리인상을 염두에 두고 대비를 해왔기 때문인데요.
“금리결정을 위해서는 대내외 경제상황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필요한데, 정보 자체가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경제가 변곡점(turning point)을 통과할 때는 상충되는 신호도 나타나고 신호의 변화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새롭게 추가되는 정보의 내용을 충분히 검토한 뒤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취임 후 첫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직설화법을 사용하겠다고 밝히셨는데, 이에 대해 우려의 시각도 많습니다. 시장에 명확한 메시지 주는 것은 좋으나, 스스로 정책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것이 아닙니까.
“(직설적 화법에 대해) 시장에서 80%는 잘했다고 평가하고, 20%는 걱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정책 결정은 신중히 하되 시그널은 분명히 보낸다는 게 기본 생각입니다. 앞으로 발언의 80%는 직설적으로, 20%는 우회적으로 할 생각입니다.”
-환란 직후 신문 기고를 통해 ‘인플레정책을 적극 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물가안정이라는 중앙은행 총재 역할과 상충되지 않습니까.
“안정 우선이냐 성장 우선이냐는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는 60~70년대에 돈을 풀어서 공장을 짓고 수출을 늘리자는 성장론자였지만 80년대엔 안정을 주장했고, 환란 때는 물가가 오르더라도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자고 말했습니다.
경기가 살아난 99년 이후엔 다시 안정을 강조했습니다. 경제정책은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 중앙은행 총재로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정부는 당장 경기를 팽창시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균형을 잡아줘야 하는 게 중앙은행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총재님의 시각이 경제 관료적 관점과 비슷해 이 같은 견제 기능이 약해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만.
“정부는 단기적 성과에 관심이 많고, 정치적 영향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그런 압력과 유혹에서 초연할 수 있습니다. 정권을 떠나 역사적 시각에서 중앙은행 총재로서의 역할을 해 나갈 것입니다.”
-한은 독립성이 어떤 면에서 부족하다고 보십니까.
“98년 한은법 개정으로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게 되면서 한은의 독립성이 높아졌으나 정부의 한은예산 승인제도, 금통위 결정에 대한 재의 요구제도 등 한은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요소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당장 제도적인 개선이 어렵다면 정부와의 대화를 통해 한은 독립성이 보장되도록 운용의 묘를 살려가겠습니다.”
-금통위원 구성 문제가 최근 논란이 돼 왔는데, 금통위원의 임기중 차출, 관료 출신 위원의 과반수 구성 등에 대해 우려의 시선이 많습니다.
“현행 한은법상 민간단체의 금통위원 추천제도는 법의 취지대로 투명하게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중앙은행이 원하는 바를 정부도 알고 있으며 이번 기회를 통해 금통위원 선임 관행이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
-감독권 없는 중앙은행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은행이 갖고 있는 감독권은 적정하다고 보십니까.
“한은은 현재 금융감독원과의 공동검사 등을 통해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정책수행에 필요한 현장정보를 적기에 입수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시기에 단독으로 금융기관을 검사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경우 중복검사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으나 한은의 검사는 어디까지나 전체 금융시스템의 안정과 관련된 정보수집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개별은행의 위규사항 점검에 중점을 두는 금감원의 검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경제구조가 바뀌면서 중앙은행의 역할과 정책수행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정보기술(IT) 발달, 수입개방, 할인점 등 신 유통망 등장으로 인해 과거와 같은 인플레 압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 있습니다.
“IT 및 유통혁명 등으로 과거에 비해 인플레 압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수요공급의 기본원리가 부정되지 않는 한 경기변동은 계속 이슈가 될 것이고 부동산 및 주식 등 자산의 가격도 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가안정을 근간으로 하는 현행 금리정책의 틀을 바꿀 필요는 크지 않습니다.”
-과거에 비해 한국은행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 분위기는 오히려 더 침체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조직문화도 관료사회보다 더 관료적이란 지적도 있고요.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 활력을 살리는 근본적인 방법은 중앙은행이 최고의 기관이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직원 각자가 직무에 충실하고 자기 계발을 통해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끝으로 재임 중 가장 역점을 둘 일, 꼭 이루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중앙은행의 확고한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고, 중앙은행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뢰 받는 기관으로 만드는 일, 그리고 중앙은행을 한국최고의 인재집단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약력
▦1936년 전북 김제 생 ▦이리공고ㆍ서울대 경제학과 ▦미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조사역ㆍ조사부 과장 ▦중앙대 교수 ▦금융통화운영위원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건설부 장관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한국경제학회장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정리=남대희기자
dh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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