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3일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53세로 작고했다.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을 실존주의와 결합하며 철학ㆍ미학ㆍ정치학 분야에서 치밀하고 난삽한 이론을 구축했지만, 이론 작업 못지않게 사르트르와의 우정과 요란한 결별을 통해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에 이름을 새겼다.대학 시절부터의 친구이자 ‘현대’지(誌)의 공동 편집자였던 이들이 결별한 계기는 한국 전쟁이었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현대’의 정치 기사와 사설을 책임지고 있던 메를로퐁티는 공산주의 국가가 침략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좌파로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공산주의 지지는 공산주의 국가의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그 전쟁은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하나의 ‘사회운동’일 뿐이었다. 그 즈음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매슈 리지웨이가 나토군의 새 사령관이 됐고, 프랑스 공산당은 그의 취임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당시 유럽에는 리지웨이가 한국 전쟁에서 세균전을 시도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프랑스 정부는 공산당 서기장 자크 뒤클로를 포함해 시위대 718명을 체포했고, 사르트르는 즉각 공산당 지지를 촉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평화’를 집필해 메를로퐁티와 상의 없이 ‘현대’에실었다.
한국 전쟁의 의미를 둘러싼 메를로퐁티와 사르트르 사이의 갈등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더 악화했고, 사르트르는 마침내 ‘현대’지의 편집권을 독점했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의 입장을 울트라볼셰비즘이라고 힐난한 뒤 비(非)공산 좌파로 선회했고, ‘변증법의 모험’(1955)을 통해 사르트르를 격렬히 비판하며 공개적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이들은 결별 이후 죽을 때까지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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