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61)씨는 경기 일산 카페의 어두운 한쪽에 앉아 있었다.‘아침 이슬’이 흘러나왔다. 그는 평온해 보였다.
투사. 생명운동가. 환경운동가. 율려(律呂)운동을 전개하는 사상가. 지금껏 시인 김지하의 이름에는 ‘저항’이나 ‘반체제’가 앞섰다.
가파른 투쟁의 시대가 지난 뒤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온 그가 이제 “나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저항 시인’이 아닌 ‘시인’.
“60여 년 내 인생은 한마디로 떠돌이였고, 나를 꿰뚫는 것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아픈 향수였다. 그 향수는 내 존재의 방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었다.”
김씨는 5월6일 오후5시 예술의전당 문화사랑방에서 제14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다.
▼“모든 현상에는 ‘흰 그늘’이 있다.”
백암산에 올랐다. 겨울이었다. 백학봉(白鶴鳳)이 있었다. ‘흰 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봉우리는 희기는커녕 우중충한 빛깔이었다.
김지하씨는 수년 전부터 사상으로서의 ‘흰 그늘의 길’을 탐색해 왔다. 흰 것과 검은 것,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 기막힌 모순을 조화롭게 아우른다.
산봉우리에도 두 얼굴이 있다. 6년 남짓 시를 쓰지 못했던 시인의 입에서 그제서야 시가 풀려나왔다.
지난해 초 쓴 시 ‘白鶴峰(백학봉)ㆍ1’은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이 됐다.
▼“감옥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74~80년) ‘흰 그늘’을 보았다고 했다. 수감 6년째 착란이 생겨났다.
벽이 좁혀 들어오고 가슴이 답답해 온몸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선에 들어갔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기이한 것인지 알게 됐다.
“빛과 어둠이, 선과 악이, 육욕과 증오가, 그리움과 혐오감 같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왔다갔다했다. ‘흰 그늘’이었다.”
그 미학적 사유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마음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시 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는 이제야 ‘흰 그늘’을 시로 옮긴다. ‘반드시 어느 한 쪽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가 나이가 들면서 ‘대립되는 것을 함께 끌어안는’ 법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김씨는 고백한다. 그는 4ㆍ19 직후 통일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민족통일연맹엔 가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친연성을 가졌음에도 비판적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는 조직에 속하지 않는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혈통이나 이념 인식이나 타고난 기질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그늘진 생애가 내 마음에 깊이 드리워진 결과였다.”
해방 직전 조선해방 게릴라 운동의 준비단계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한 김씨의 아버지는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영암 월출산에 빨치산으로 입산했다. 그 아버지가 월출산을 하산하던 날의 심정을 김씨에게 털어놓았다.
“그것(공산주의)은 틀렸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 밖엔 없어. 아직까지는 그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틀렸어!”
계간 ‘시와시학’ 여름호에서 조동일(63) 서울대 교수와 나눈 대담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사실 가짜가 더 많다. 진짜라 할지라도 그 밑뿌리에 깊은 고심이 없다. 진짜 중의 진짜는 좌든 우든 나라의 분단을 걱정하고 개종한 사람이다.”
▼“삶과 텍스트는 분리될 수 없다.”
김지하씨는 미당 서정주(1915~2000)에 관해 짤막하게 얘기했다.
미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미당의 시는 지나치다”고 말한다. 치열한 현실이 텍스트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쑤시고 죽이고 피를 토하는 시대에 미당은 현실 감각이 없는 환상적인 시를 썼다.”
미당이 말을 잘 다루는 재주꾼이었다고, 신라 향가의 맥을 짚은 장인이었다고 평하면서도, “그의 시는 뭉클한 감동까지 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미당이 삶을 온전하게 살지 않았던 결과인 듯 싶다고 김씨는 말했다.
▼“많이 써야겠어. 많이 써야 한 편이라도 고르지.”
그는 이제 열심히 시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뮤즈가 웃음을 보내야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쓰고 자꾸 쓰면서 올 때를 기다려야겠다”고 한다.
김씨는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 시 15편을 한꺼번에 발표한다. 5월 중순께 ‘김지하 사상전집’이 출간되고 올해 안에 시집도 펴낼 참이다.
난초도 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그동안 그린 난초 70여 점을 모아 ‘묵란(墨蘭)’전을 열었다.
지금도 하루에 두 시간씩 붓을 잡고 난을 친다.
“다음해 벚꽃이 필 무렵에 일본 도쿄(東京)와 교토(京都)에서 난초 전시회를 열 것”이라고 한다. “똑똑하고 잘난 듯 굴 때는 사는 게 힘들더니, 어수룩해지니까 일이 잘 풀린다”면서 밝게 웃었다.
모든 현상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김지하씨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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