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해 비안도 앞바다에서 고려청자 수백 점이 인양돼 떠들썩하다. 26년 전 국내 수중 고고학 발굴의 첫 발을 내딛은 전남 신안의 해저유물 발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이 곳 역시 1976년 1월 한 어부가 청자 화병을 건져 당국에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전국의 도굴꾼들이 떼지어 몰려들어 현장 보존이 어렵게 되자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해군 해난구조대의 지원을 받아 그 해 10월 본격 발굴에 착수했다.
첫 해 1,2차 발굴에서만 8,000여점의 유물을 인양하는 개가를 올렸다.
첫 발굴 때 최신 장비를 갖춘 해군도 유물 위치를 찾지 못했는데 목포경찰서에 붙잡힌 도굴꾼을 데려오니 쉽게 찾아냈다.
그 바람에 해군이 무안을 당했다. 발굴 작업 중에는 유물이 묻힌 곳에 부표를 설치하고 감시선을 배치했는데, 감시선이 도굴꾼과 합작해 야밤에 유물을 몰래 인양해가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그 후로도 바다는 마치 화수분처럼 유물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84년 8월까지 무려 10차에 걸친 발굴에서 총 2만2,000여점의 중국 송(宋) 원(元)대 도자기와 동전 28톤, 형체가 남은 부분만 길이 28m에 달하는 선체를 인양하는 성과를 거뒀다.
나는 문화재연구소 민속예능실장으로 처음부터 발굴에 참여한 후 발굴반장으로 전 기간에 걸쳐 현장을 지켰다.
해저 발굴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3,000톤 짜리 모함을 현장에 정박해두고 잠수사들은 8평 남짓한 바지선에서 대기하다 조수가 완전히 정지하면 30~50분 가량 급히 유물을 건져올렸다.
그래서 인양 작업은 하루에 많아야 세 번, 보통 두 번 밖에 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썰물 때 대형 닻을 연결한 기둥이 갑자기 기울면서 3.5인치 철제 와이어가 갑판을 덮쳐 한 해군 병사의 엉덩이 살이 뭉텅 떨어져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가장 큰 고역은 물 부족이었다. 첫 해를 제외하고는 가장 물때가 좋은 6~7월에 발굴이 이뤄졌는데 뙤약볕 아래 해상에서 종일 작업하느라 온 몸이 소금범벅이 됐지만 먹을 물도 귀해 목욕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소주와 찜닭을 몰래 가지고 가서 모함 포탑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던 일 등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언론사 취재진이 신안에 몰려들면서 소설을 방불케하는 온갖 추측 보도가 난무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81년 선체 인양이 시작되고 83년 9차 발굴 때는 글씨가 새겨진 ‘물표’(화물 꼬리표)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신안 보물선’의 실체가 드러났다.
물표 판독 결과, 이 배는 1323년께 중국 원의 경원로(慶元路ㆍ지금의 닝보ㆍ寧坡)항에서 출발해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다 난파한 것으로 추정됐다. 인양된 선체는 현재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돼있다.
사상 첫 해저 발굴에서 이처럼 대단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발굴에 참여한 이들의 인간애 넘치는 협력 덕분이었다.
당시 발굴조사단은 고고학과 도자기는 물론, 해양학 조선공학 문헌연구 등 각 분야의 으뜸가는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해군, 신안군청 등과도 손발이 척척 맞아 주위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비안도 유물 발굴에서 이런 값진 경험들을 밑거름 삼기를 바란다. 80년대 완도, 죽도 유물 발굴 때처럼 개인 용역회사를 동원하는 일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려 때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였던 강진과 부안에서 만들어진 청자들을 타지로 운송하던 선박의 이동 경로 등 당시 도자산업의 정확한 실태에 대해서도 면밀한 조사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호관 전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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