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으로서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면 “참으로 가파른 길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시작된 그의 정치 역정은 지역주의 극복과 동서통합에 대한 처절한 신념, 야권 분열에 대한 일관된 저항으로 특징 지워진다는 것이 당 안팎의 평가다.
그러나 노 후보가 정치적 소신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 비타협적이 되면 될수록 현실 정치에서의 그의 입지는 점점 더 소수파로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7년11월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다시 인연을 맺은 뒤에도 그는 여전히 비주류 소수파였다.
그러나 노 후보는 이번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비주류에서 주류로의 질적 변화를 이뤄내면서 그의 소신이 정치사적 재조명을 받을 수 있는 정치적 부활의 계기를 만들어 냈다.
■ 소신, 그러나 비주류의 길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던 노 후보의 정치행로는 김영삼(金泳三ㆍYS) 전 대통령이 열어줬다.
1988년 노 후보는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의 재야 영입 케이스로 부산 동구에서 공천을 받아 당시 민정당의 허삼수(許三守) 의원을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YS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노 후보는 YS가 90년1월 전격적으로 민정ㆍ민주ㆍ공화당 등 3당 합당을 선언, 민자당 창당에 합류하면서 정치적 변신을 꾀하자 “야권을 분열시키고 군부독재에 면죄부를 주는 정치야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YS와 결별했다.
노 후보의 소수파로서의 험로가 시작된 것이다. YS와의 결별은 DJ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YS로부터 이탈한 세력이 뭉친 이른바 ‘꼬마 민주당’의 주역으로 노 후보는 당시 DJ가 이끌던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1991년9월 통합민주당의 출범을 보게 된다.
‘DJ 당’의 성격을 지우지 못했던 통합민주당의 간판을 내걸고 1992년3월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노 후보는 1992년12월 대선에서 DJ의 당선을 위해 전국을 누비는 등 노 후보와 DJ의 정치적 동행은 95년9월까지 4년여 동안 지속된다.
DJ가 1995년6월 제1회 지방동시선거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이기택(李基澤) 전 총재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같은 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 후보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몰린다.
노 후보는 결국 국민회의 창당을 야권 분열행위로 규정, 민주당에 잔류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정치적 소수파로서의 노 후보의 역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기택 전 총재가 지역구도 극복과 야권 통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 노 후보 등은 통일민주당과도 거리를 두게 된다.
기존 정당의 틀을 뛰어 넘어 국민통합추진회의(상임대표 김원기ㆍ金元基, 약칭은 통추)의 간판을 내건 것도 이러한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때 통추에서 함께 활동하던 인사가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김원웅(金元雄) 의원, 민주당 김정길(金正吉) 전 의원 등이다.
이 때가 노 후보로서는 가장 비타협적인 길을 걸을 때이고 자연히 현실적 정치지형에서 차지하는 영역에서는 가장 좁은 무대에 서 있을 때이다.
이러한 비타협적 노선은 97년 대선 국면을 맞아 변화를 겪게 된다. 노 후보는 대선 참여 방식을 놓고 통추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 ‘3김 정치 종식’보다는 ‘정권교체’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게 된다.
이것이 DJ 당인 국민회의 입당으로 이어졌고 이번 대선후보경선 과정에서 정치적 경쟁자로부터 “DJ를 비난하던 노 후보가 DJ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무임 승차했다”는 비난의 소재로 쓰여졌다.
■ 정치 입문 이후의 영욕
세인들이 정치인으로 노 후보를 기억하는 것은 ‘5공 비리 청문회 스타’로서, 또 국회 노동위 3총사로서다.
1988년 정치 입문 이후의 의정활동을 치열한 민주화 투쟁의 연장선으로 여겼던 노 후보는 스스로도 그 때가 “가장 잘 나가던 때”라고 회고한다.
장세동(張世東) 전 안기부장 등을 상대로 한 5공 청문회 증인신문에서 그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으로 자신을 대중 정치인으로 끌어 올렸다.
당시 그는 이해찬(李海瓚) 이상수(李相洙) 의원 등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면서 부처 장관들에게는 악명 높은 정치인으로, 파업현장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영광은 짧았고 좌절은 길었다. 그 좌절은 동서통합에 대한 그의 정치적 소신과 직결돼 있다. 그는 1992년 DJ 당인 통합민주당 후보로 굳이 다시 부산 동구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신다.
이러한 오기는 정치입문 과정에서도 발휘됐었다. 그의 동료 인권 변호사였던 문재인(文在寅) 변호사는 노 후보가 88년 지역구를 부산 동구로 택한 데 대해 “5공세력의 핵심이었던 허삼수씨를 꺾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노 후보는 95년6월 부산시장 선거에도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96년 15대 총선에서는 ‘꼬마 민주당’ 간판으로 서울 종로에 나섰다가 패배했고 국민회의 입당 후 1998년7월 치러진 종로 보궐선거에 재도전, 오랜 만에 의정단상에 복귀했다.
그러나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다시 발동, 부산 북ㆍ강서 을에 나갔다가 다시 패배함으로써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2000년8월부터 8개월간 재임 해양수산부 장관 자리는 DJ가 준 선물이었다.
■ 정치적 과격성 논란
노 후보의 정치 행로와 그의 정치 성향을 얘기할 때 꼭 따라 다니는 말이 “좀 과격하지 않느냐”다. 1988년 당시 노 후보가 미군철수를 주장했고 “재벌을 해체, 노동장의 세상을 만들자”고 목청을 높였다는 것이 노 후보의 이념과 노선을 불온시하는 이유다.
노 후보의 정치적 과격성은 90년7월 민자당의 방송관계법 날치기 처리에 항의,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는 등 두 번에 걸쳐 의원직 사퇴 소동을 벌인 것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노동위 3총사의 한 사람이었던 이해찬 의원은 “그 때는 노동자가 법의 보호를 아예 받지 못했을 정도로 현저하게 인권이 탄압 받고 있을 때”라며 “때문에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일반적 현상이었다”고 회고한다.
노 후보는 분파적 행동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만들어 나간 것 아니냐는 비난도 받는다. 이에 대해 이해찬 의원은 “옆에서 같이 겪어 보지 않으면 그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그가 부산을 떠나 정치를 했다면 얼마든지 영광의 길을 갈 수도 있었고 주류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며 노 후보를 엄호했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노무현 정치일지▼
1978.5월 변호사 개업
1981 부림사건 변론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 시작
1984 부산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1987. 4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 위원장(87ㅕㄴ6월 항쟁 참여)
1987. 9월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
1987.11월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
1988. 4월 YS에 발탁돼 13대 국회의원 정계입문(부산 동구)
1988 제5공화국 비리조사특위위원으로 활동,청문회 스타로 부상,국회 노동위 간사
1990 3당합당 거부하고 민주당 창당 주도,민주당 기획조정실장
1990.7월 민자당의 방송관계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이해찬 등과 함께 의원직 사퇴서제출
1991 신민-민주 야권 통합주로 DJ와 인연
1992 14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통합민주당,부산동구)
조선일보 왜곡보도 관련 소송에서 승소
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위원장
1993.3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최연소),부산시 지부장,당무위원
1995.9월 DJ국민회의 창당에 반대,민주당 잔류
1996.4월 15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민주당,서울 종로)
1997.11월 국민회의 입당으로 DJ와 다시 연대,국민회의 부총재
1998.7월 15대 국화의원 종로 보궐선거 당선(국민회의)
1998 현대자동차 파업중재
1999 국민회의 부산 북구·강서구 을 지구당위원장
2000 16대 국회의원 낙선(민주당,부산 북구·강서구 을)
2000.8월 해양수산부 장관(2001년3월까지)
2001.4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2001.9월 부산후원회에서 대권 도전 선언
2001.10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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