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공산권 국가는 억압과 통제 때문에 분위기가 어두울 것이라는 우리 예상과 달리, TV로 전해진 유고는 선남선녀가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평화스러운 나라였다.그러나 그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유고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전쟁은 한 순간 찾아왔지만, ‘인종청소’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을 9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인들이 아랍 땅을 짓밟은 십자군전쟁이 있다.
유고내전과 십자군전쟁의 실상을 고발한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전쟁’이평화를 생각하게 되는 가정의 달을 앞두고 동시에 나왔다. 하기사 평화를 생각하게 하는 달이 어디 이 때 뿐이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피터 마쓰 지음ㆍ최정숙 옮김
미래의 창 발행ㆍ1만2,000원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ㆍ김미선 옮김
아침이슬 발행ㆍ1만5,000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1992~93년 워싱턴포스트 특파원으로 유고내전을 취재했던 피터 마쓰의 현장 기록이다.
유고내전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대세르비아주의’를 기치로 92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공습하면서 시작돼 27만명의 사망자와 200만명의 난민을 낳고 95년말 끝났다.
96년 출간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논픽션상을 수상한 이 책이 전하는 참상은 90년대 초 외신을 타고 들어온 내용과 일치한다. “거의 이틀동안 죄수(보스니아인 포로)들에게 물을 주지 않아 지쳐 죽기 시작했다.
일부는 울부짖으며 물을 달라고 호소했다. 경비는 총을 쏴서 이들을 입다물게 했다. 약 20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하루 뒤 문이 열렸을 때 살아서 나온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전쟁광들이 평소 문명자의 생활을 한 사실도 꼬집는다. “인종청소를 자행한 이들이 평화 시에는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고 거실에 소니 TV를 갖고 있던 전직 변호사와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저자가 밀로셰비치와 인터뷰하며 겪은 심리적 갈등, 전쟁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시 관리자, 시의회 의장, 행정담당 시장 등 원하는 직함을 마음대로 가진 밀란 코바셰비치의 이야기도 나온다.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하다. 겉으로는 문명이 발달한 듯 보여도, 밀로셰비치와 같은 독재자가 사회 갈등을 이용해 선동하면 인간은 언제든 전쟁에 휩쓸릴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그 조그만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저자는 87년부터 3년간 서울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기사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전쟁’은 공쿠르상 수상 작가이자 아랍 역사에 정통한 아민 말루프의 83년 작.
유럽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이유로 1096년부터 1291년까지 9회에 걸쳐 아랍 땅을 공격한 십자군전쟁은 유럽의 눈으로는 ‘성전’(聖戰)이었다. 그러나 아랍인에게는 약탈과 침략일 뿐이라고 저자는 잘라 말한다.
십자군은 기사뿐 아니라 농민, 불량배까지 포함된 잡다한 군대였다. 금전적 보상과 죄사함을 약속한 교황의 말에 따라 십자군에 참여한 이들은 일확천금과 새로운 영토를 찾아 아랍 땅으로 들어왔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지나가는 마을을 약탈과 방화, 살육으로 모두 초토화시켰다. 아랍 땅의 기독교도와 유대인들도 화를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중해 상권을 노리는 베네치아 상인때문에 예루살렘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로 기수를 돌려 같은 기독교인을 죽이고 비잔티움의 귀중한 보물을 약탈한 4차 원정에 이르러서는 성전의 겉껍질마저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책은 아랍 내부의 문제점도 솔직하고 대담하게 피력한다. 전쟁 직전의 아랍은 지도자는 무능하고 관료는 부패했으며 폭압 정치로 백성들은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여서 메카,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에게 세번째로 중요한 성지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손에 넘어가고 수만명의 이슬람교도가 학살을 당해도 종파와 부족의 패권 다툼은 계속됐으며 유럽과 연합해 다른 세력을 견제하는 일까지 있었다.
책은 기독교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렇다고 아랍의 잘못도 포용하지는 않은 것이다.
유고내전이든, 십자군전쟁이든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고 고통스러운지는 한국인들이 이미 50년전에 겪은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죽고 죽이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류가 평화롭게 사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책은 그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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