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만만치 않은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고 있다.대선후보로서의 정치력과 위기관리능력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상황에서 노 후보의 최근 언행에 대한 당 안팎의 평가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및 김 대통령의 세 아들 문제 등에 있어서 노 후보의 정치적 처신은 결정적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민감한 현안들에 대해 노 후보는 상당히 다의적인 어법을 통해 양쪽을 저울질하면서 정치적 복선을 까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노 후보가 많이 달라졌다”는 기대반 걱정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 후보는 24일 “국정운영에 관해 대통령이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노 후보는 그러나 “이 정부에서 할 일을 해야 하는데 안 돼 있을 때는 다음 정부의 숙제가 되며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인간적 도의를 저버리는 명분 없는 차별화는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김 대통령의 책임 문제를 자기와 분리시키는 동시에 ‘적절한 처리’를 촉구하는 우회적인 압박의 뜻으로도 해석된다. 차별화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차별화의 효과를 얻고 있는 셈이다.
노 후보는 또 앞으로 모든 현안에 대해 “당의 새로운 지도부와 협의, 공론으로 형성되면 그것을 따를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함으로써 당의 입장을 수용하는 형태를 통해 자신이 직접 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겨 뒀다.
김 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사이에서도 노 후보는 난이도 높은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노 후보는 3당 합당을 비난하면서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연대 의사를 숨기지 않는다.
아직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DJ-YS 관계에서 노 후보는 정치적 명분으로나, 현실적 득표전략으로나 양쪽 모두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노 후보는 미국에 대해서도 다의적 포석을 깔고 있다. 노 후보는 “미국이 불안해 하지 않는데 오히려 국내에서 불안을 부추기는 것은 사대주의”라며 안정감을 부각시키면서도 “사진이나 찍기 위해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고 자존심을 내세웠다.
역대 선거에서 줄곧 대선기획업무를 맡아 온 이해찬(李海瓚) 의원은 이러한 접근 방식에 대해 “후보는 냉철하게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며 후한 점수를 줬고 임채정(林采正) 의원은 “김 대통령을 몰아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