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 좇자니 그림이 저어되고, 그림만 따르자니 사람이 보이지 않을까 두렵고. 그래서 그림 속에 사람을 집어넣었다.구 한말 천민출신의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1843~1897)의 일대기를 그려가는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그림에서 예술혼과 한 천재화가의 삶을 엿보고자 했고, 그 천재의 기행(奇行)에서 과장과 즉흥의 빼어난 선경산수화의 근원을 찾아보고자 했다.
천재성과 기행이야말로 장승업을 설명하는 캐릭터이고, 임권택 감독이 끝까지 놓치지 않은 영화의 화두였다.
그는 천재성으로 예술(작품성)을 얻고, 기행으로 영화적 재미(대중성)와 사회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새로운 실험은 아니다.
예술가의 생애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에 그렇게 해왔고, 늘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가진 시도였다.
회상 형식으로 시작하는 ‘취화선’은 고아 거지로, 화방의 심부름꾼으로, 남의 집 머슴으로 떠돌던 장승업의 어린시절을 빠르게 훑어 지나가간다.
그러면서도 이후 그의 삶을 설명할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빼놓지 않았다.
바로 천부적 재능과 타고난 신분. 재능은 평생 그의 후원자인 선비 김교원(안성기)와의 인연으로 이어지면서 독창적인 그림이 돼 천하를 놀라게 하며 신분의 한계는 절망과 현실에 대한 반항, 허무주의, 자유분방함의 에피소드로 표현돼 관객들을 웃게도, 마음 아프게도 한다.
장승업은 신분의 벽 때문에 첫사랑인 역관 이응헌의 딸 소운(손예진)에게 다가갈 수 없는 외로운 마음을 한 마리 학으로 그리기도 하고, 양반의 딸로 기생이 된 매향(유호정)에 대한 고마움을 그녀의 흰 치마폭에 매화 그림으로 남기기도 한다.
예술가로서의 자기 완성과 세상에 대한 갈등을 술에 만취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갑신정변과 동학농민혁명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아픔을 그는 어명도 팽개치고 방랑생활을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임권택 감독은 한 인물, 그것도 대중성을 벗어난 예술가의 일대기를 영화로 그릴 때 오는 상투성(연대기적 서술과 드라마식 구조)을 걱정한 듯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드라마를 이어가기 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끊어가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덕분에 영화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장승업에게 늘 그림을 배우려는 나이 어린 파트너를 설정해 그와의 충돌에서 오는 코믹성이 영화의 오락성을 높이고 전체의 분위기를 밝게 한다.
‘취화선’이 영화가 아니라 그림이라면 아마 이 보다 더 아름다운 한국의 산수화 풍경화는 없을 것이다.
시간과 땀을 흘려 찾아낸 가을 산과 봄 들과 달빛 머금은 개울과 겨울 강과 여름 개펄과 철새, 빗물 머금은 거미줄에서 세트로 완벽하게 재현한 한옥과 초가, 초가 지붕의 박 넝쿨, 주막, 장독, 도자기를 굽는 가마까지.
우리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니, 외국인들의 눈에는 어떨까.
게다가 동양화는 물론 영화 전편에 깔리는 국악, 다도(茶道), 구성진 판소리와 구음, 화사한 의상 등을 두루 아우른 ‘취화선’이야말로 ‘서편제’와 ‘춘향뎐’에 이은 임권택 감독의 3번째 ‘우리 것 드러내기’ 영화인 셈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자, 분명 해외영화제(칸영화제)를 겨냥한 포석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서편제’같은 흥행의 부담을 안고 있는 임권택 감독.
‘취화선’에서의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장승업과 기생들의 노골적인 정사장면과 김병문 같은 사회비판적 인물의 설정, 웃음을 위한 장승업의 현대식 욕설과 대사는 아직도 그가 그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5월 10일 개봉.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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