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학에 들어간 딸이 3년 전부터 밥을 너무 적게 먹었어요. 그렇지만 운동도 열심히 하고 해서 아무 이상이 없는 줄 알았죠. 키가 165cm인데, 35kg밖에 안돼 이젠 백혈병환자 같다는 소리까지 들어요. 병이라는 걸 알았으면 진작에 치료했어야 했는데….”“딸(30세)이 5년 전부터 살 빠진다는 차를 마시더라구요. 그게 다이어트의 시작이었죠. 이젠 아예 먹고 토하는 게 일상사가 된 것 같더라구요. 노크없이 방에 들어가면 심하게 화를 내요. 늘 뭔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지요. 빵 껍질이나 과자봉지가 널려 있고….”
16일 양재동 백상신경정신과에는 거식증과 폭식증 같은 식이장애를 앓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모임 ‘나사모’(나를 사랑하는 모임)가 열렸다.
정신과 의사 강희찬, 박선자씨와 함께 한 자리에서 다섯 명의 엄마들은 “식이장애로 인해 아이들은 성격까지 무섭게 변했다”며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었다.
“거식증을 앓는 제 아들(28세)이 절 때리고 칼로 위협도 했어요. 그렇게 착하던 애가…. 맞아서 제 눈이 시퍼렇게 멍든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게 아프다기보다는 ‘엄마 나 좀 고쳐줘’ 하는 절규로 들리더라구요. 이렇게 증상이 심할 줄은 정말 몰랐지요.”
“우리 딸은 일흔 넘은 할머니가 꼭 종처럼 수발을 듭니다. 한밤 중이라도 사오라는 과자를 당장 안 사오면 살림을 때려 부수고 난리가 납니다. 집안에 가구가 성한 게 하나도 없어요.”
“아이 때문에 가족들이 1년 내내 고기 한번 못 먹었어요. 식탁에 고기나 기름진 게 올라오면 어찌나 화를 내는지….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는 이런 병은 없었겠지요.”
“아이가 변했다기보다는 병이 아이를 휘둘러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강희찬 원장의 분석이다.
▼치료 첫 걸음은 세끼 식사
“고등학교 1학년 때 하도 아이가 마르길래 집 근처 가정의학과를 갔더니 ‘정신과로 가라’고 하더군요. 아이가 끔찍이 싫어했지요. 별 소리 다 들었어요. “집에 불지르고 자살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으니까요.”
“남편이 두 번이나 심장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아이의 병이 더 끔찍한 것 같아요. 그렇게 속으로 멍들어가도 남들이 보기에는 멀쩡하거든요.”
박선자 원장이 ‘병원문을 들어서는 게 치료과정 중 가장 어려우면서 중요한 단계’라고 말한다.
“이 병은 외국에서도 환자 스스로 병을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야 절반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병을 조기발견 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폭식과 구토가 6~7년이 지속되면 골다공증이 이미 진행되기 시작됩니다.”
한 엄마가 묻는다. “그래도 본인이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면 효과가 있을까요?”
“치료의 60~70%는 가족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이가 달라는 음식을 다 주면서 기분만 맞추거나, ‘언젠가 먹겠거니’ 하며 때만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원망을 듣더라도 일단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박선자원장)
“입원 두 달째인데, 어느 정도 정상적인 식사 습관을 갖게 됐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귀가, 가족들을 괴롭히면 스트레스를 받아 막 먹어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폭식인 거죠. 아직까지 다른 방법을 모르는 겁니다. 병을 고치는 데는 정상적인 식사 못지않게 스트레스를 제대로 극복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포함됩니다.”(강희찬원장)
“아이가 치료를 그만두고 싶어해요. 이젠 살찌는 게 싫대요.”
“치료의 첫걸음은 정상적인 세 끼 식사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배고픔에 익숙해 왔던 환자들이라 체중 회복에 대한 두려움이 클 것입니다. 그럴 때 부모가 얼마나 잘 잡아 주느냐가 정말 중요하지요. 치료하는 데 평균 5년 정도는 걸리죠. 20년간 병을 앓는 환자도 있습니다. 다른 병이라면 이 정도 만성질환은 회복이 불가능하겠지만 다행히도 식이장애는 적절한 치료만 받으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박선자원장)▼식이장애 체크 리스트
* 거식증
_ 체중감소가 심하다.
_ 매우 말랐음에도 ‘살이 쪘다’고 말하며 체중증가를 몹시 두려워한다.
_ 월경이 3개월 이상 불규칙하다.
_ 지나치게 운동을 열심히 한다.
_ 음식을 아주 작은 조각으로 잘라 먹거나 소량을 오랫동안 씹어 먹는 식사습관이 있다.
_ 크고 헐렁한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
_ 자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통제하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 폭식증
_ 집안에서 음식이 자주 없어진다.
_ 먹은 것을 토하기 위해 식사 후 매번 화장실에 다녀온다.
_ 변비약이나 이뇨제 포장지가 휴지통에서 자주 발견된다.
_ 턱 주위의 침샘이 붓는다.
_ 자주 폭식하는데도 체중은 대개 정상범위이다.
_ 기분변화가 심하다.
_ 월경이 불규칙해진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식이장애는 가족상담이 가장 근본 치료
거식증ㆍ폭식증 등 식이장애는 선진국에서는 20여년 전부터 문제가 되어 왔다.
미국ㆍ유럽 등지에서는 10~30대의 젊은 여성 중 거식증 환자가 1%, 폭식증 환자가 3%에 달한다.
정상체중의 85% 이하로 몸무게가 심하게 감소하는 거식증은 사망률이 5%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폭식증은 대부분 정상체중을 유지하기는 하나, 신체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서울중앙병원 소화기내과 민영일 교수는 “위가 몹시 늘어나 제 기능을 못하거나 심한 경우 터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식이장애 환자는 대부분 병을 숨긴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환자가 많을 것으로 추산되지만 환자 통계는 없다.
지난해 한국 식이장애센터가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 stopdiet. co. kr)를 통해 실시한 식이장애 조사 결과, 응답자 1,800여명 가운데 장애 증상자는 6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병원을 찾은 환자는 2.5%에 불과했다.
이들이 병원 찾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식이장애가 수치심과 죄책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오랜 폭식과 구토로 인한 고립감이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환자 중 상당수가 “다이어트를 제대로 못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착각, 음식과 체중에 대한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비만클리닉을 전전하며 병을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식이장애클리닉 ‘마음과 마음’ 김준기 원장은 “비만클리닉 방문 환자 중 3분의 1 이상이 식이장애 환자”라고 말한다.
환자의 80%가 젊은 여성일 정도로, 다이어트가 식이장애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전문가들은 이 질병을 단순히 다이어트와 음식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동수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과장은 “유전적 요인, 사회문화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섞인 뇌신경장애다.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에 실패해 음식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모녀(혹은 모자)간에 심한 애증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말한다.
음식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세 끼를 정상적으로 먹는 식사치료, 약물치료, 비슷한 증세를 겪는 환자들끼리의 집단교육 등 여러 치료법 가운데 가족상담 치료가 가장 근본적인 치료법으로 꼽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가족은 발병과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상담에 나선 부모들도 있는 반면, 기겁하며 질병의 실체를 부인하거나 ‘네가 마음만 먹으면 낫는다’며 환자를 몰아세우는 가족들의 무지로 고통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안타까워한다.
김준기 원장은 “가족과의 갈등으로 치료 중에 자살하는 환자들이 있는 반면, 7~8년 고생하던 환자가 단지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치료된 경우도 있다. 식이장애는 가족의 붕괴, 정신적 가치의 소멸 등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집약하고 있는 병”이라고 말한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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