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해부실습실의 사체가 세상의 빛 속으로 나왔다.포르말린의 역한 냄새 속에 의학 전공자에게만 은밀한 모습을 드러내던 인체 주검 표본이 특수 화학공법으로 처리돼 일반인 앞에 나타났다.
17일 오전 10시, 서울 혜화동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인체의 신비’ 한국 전시회가 시작됐다.
세계 15개 도시에서 15년간 850만 명이나 관람을 했다는 대단위 과학행사다.
‘입장객 중 매일 한 명 꼴로 기절을 한다’는 주최측의 홍보 전략 때문인지 관람객들은 호기심에 가득찬 모습이다.
입장권을 끊고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숨이 멎기 시작한다.
사람의 뼈부터 시작해 신경계, 호흡기 등의 인체 장기가 실물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면 충격적인 전시물이 나타난다. 살아있는 듯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인체 표본이다.
골격과 근육, 신경이 각각 분리된 인체 표본 중에는 심지어 자신의 뇌를 꺼내 들고 있는 형상도 있다.
그러나 200여 점의 전시물은 ‘사실감이 주는 혐오스러움’을 제외하고는 실제 인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
자연적인 생명현상인 부패는 인체의 형태학 연구에 큰 걸림돌이었다.
특히 일반적인 대기와 토양 상태에서는 생물학 표본의 경우 쪼그라들거나 형체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적절한 인체 주검 표본의 보존기술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해부학자들의 꿈이었다.
독일의 군터 폰 하겐스 박사가 1977년 개발한 플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을 통한 표본 보존법은 이같은 꿈을 가능하게 했다.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 조사선 교수는 “예전에는 포르말린을 채운 병 속에 넣어 썪지 않도록 방부 처리하는 방법만 가능했지만 하겐스 박사의 화학공학기법 개발로 해부학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포르말린은 독성이 강하고 자극적인 성질이 있어 특수 환기시설을 갖춰야 했다.
플라스티네이션은 인체 조직의 대부분을 이루는 수분과 지방을 반응성 플라스틱인 실리콘 고무, 에폭시 수지, 폴리에스테르 등으로 교체하는 기법이다.
▽ 아세톤과 특수 플라스틱 이용 제작
우선 기증받은 사체에서 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수분을 없애기 위해 영하 30도의 차가운 아세톤 수조에 집어 넣는다.
지방질은 실온의 아세톤에 넣으면 뼈에서 떨어져 나간다. 아세톤에 젖은 표본을 진공상태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아세톤이 빠져 나와 빈 공간이 생기게 된다.
빠져 나간 아세톤 양만큼 유동성이 있는 특수 액체 플라스틱을 집어넣은 뒤 특수가스나 자외선 등으로 보존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떤 모양의 인체 표본이라도 제작이 가능하다.
실리콘 고무를 넣으면 표본에 탄력성이 생겨 실제와 같은 표본을 만들 수 있다. 뼈와 뇌, 내부 장기 등에 주로 실리콘 고무를 쓴다.
다른 화학물질인 에폭시 레진은 얇은 표본을 만들 때 사용한다.
혈관 계통은 플라스틱 폴리머를 주입시켜 딱딱하게 만든 뒤, 다른 조직을 화학물질이나 기계를 이용해 제거하는 방식으로 전시된다.
플라스틱 폴리머는 하겐스 박사가 자체 개발한 특수 화학물질이다.
그는 “인체 전신 표본을 만드는 데 대략 1~3년 정도가 걸린다. 남성 기증자의 신체는 근육이 돋보이는 전신표본으로, 여성은 장기 위주로 표본화한다”고 말했다.
특히 지지대 없이도 전신 표본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플라스티네이션 기법 덕분이다.
조 교수는 “미라는 건조한 날씨에서만 보존이 가능하지만 이 방법을 쓰면 상온에서도 영구 보관이 가능하며, 특수 플라스틱을 쓰기 때문에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해부학 방식 소개… 인체에 대한 애정표현"
“일반인에게 죽음과 삶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만들고 해부학이라는 과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개하기 위해 한국 개최를 결정했습니다.”
플라스티네이션 창시자 군터 폰 하겐스(57ㆍ독일 플라스티네이션 소장) 박사의 첫 인상은 괴짜 과학자다.
옛 동독 출신인 그는 197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마취와 응급의학 전공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해부학 연구소에서 새 해부학 연구 방법을 찾던 중 플라스티네이션 기법을 개발했다.
하겐스 박사는 “영화 제작자들이 해부학 실습실을 공포물의 무대로 만들며 일반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것을 깨고 싶었다”며 “특수 플라스틱을 이용해 인체를 영원히 보존해 교육, 학술적인 목적에 사용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세상의 삐딱한 시선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유럽의 종교 지도자들은 죽은 사람의 몸이 살아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문제 제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해부학 교과서를 쓰기도 했고, 해부학 장면을 일반인에게 보여주는 극장도 있었습니다.”
하겐스 박사는 또 “건강한 장기와 그렇지 못한 장기를 비교 전시하고, 죽음의 끔찍함보다는 사람의 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려 했다. 전시장 관람객의 10% 이상이 반년 내에 금연을 결심하고, 건강과 의학, 과학 전반에 대해 관심을 높였다는 조사결과도 있다”고 말했다.
25년간의 연구를 위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기증 받은 사체는 6,500구가 넘는다.
그 역시 “내가 죽은 뒤 시신 기증은 당연하며 죽어서도 해부학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라며 “기증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 것이 해부학의 전통이지만 한국인은 아직 기증자가 없다”고 덧붙였다.
정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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