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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내 과거를 모두 잊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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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내 과거를 모두 잊어달라'

입력
2002.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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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은 축구와 삼바춤 같은 열정적 인상이 먼저 다가오는 나라다.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든가, 현 대통령의 파란 많은 전력 같은 조금 복잡한 얘기들은 그 강렬하고 대중적인 이미지에 쉽게 묻혀 버린다.

브라질의 페르난도 엔리코 카르도수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 우리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또 경선에서 좌우 이념문제와 공방이 뜨거운 까닭이다.

■카르도수 대통령의 변신

중도우파 노선의 카르도수 대통령은 대학교 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성직자를 꿈꾸기도 했다.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를 하던 중 군사정부를 비판한 대가로 공민권이 박탈되고 4년간 망명생활을 한다.

그 기간 동안 저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와 발전’ 등을 펴내며 종속이론의 유명한 이론가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종속이론은 이 지역의 해방신학론과 함께 1960~80년대에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좌파 이론이다.

공민권이 회복된 후 정계에 입문,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8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사회민주주의자로 조정한다.

추상적 이념보다는 현실의 구체적 악 제거가 더 중요하다는 ‘생존 가능한 좌파론’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한번 변신했다.

94년 선거 때 자신이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우파 지배세력인 자유선전당과 연합한 것이다.

학계와 지식인의 비난이 거셌다.

그는 지식인 카르도수에서 현실 정치인으로 길을 바꾸며 변심한 애인처럼 말했다. “과거 내가 쓴 글은 모두 잊어달라.”

카르도수는 승리했고 집권 1년만에 연간 2,000~3,000%에 이르던 초고율 인플레를 30%로 꺾었다.

정치ㆍ경제 개혁을 밀고 나간 그는 99년 대선에서도 브라질 역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모든 행적을 정치인의 이상적 궤적처럼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의 강한 개혁의지와 융통성, 이상과 현실을 결합시키는 과감한 행동력을 보며 정치가에게는 때로 그런 능력이 요구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브라질은 의회에 대표를 낸 정당만 18개나 된다.

그런 복잡한 정치 역학 속에 카르도수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변신, 혹은 이념적 곡예를 수용한 국민의 포용력 역시 크고 넉넉해 보이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우연히 시인 고은 씨를 만났다.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지식인 사회를 양분시킨 언론계 풍토를 걱정하고, 미당 서정주를 비판한 후 쏟아진 자신에 대한 터무니 없는 비방보도 등을 얘기하는 그의 표정은 피곤해 보였다.

그러면서 “온건한 중도 좌우파가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라고 덧붙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제와 보면 그 말은 개인적 희망일 뿐 아니라, 다수 대중의 바람을 대변했던 것 같다.

몇 달 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념논쟁에 불이 붙었고, 그 한 모퉁이에서 노무현 바람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색깔론ㆍ지역주의를 넘어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제 국민의 보수ㆍ혁신에 대한 의식은 종전처럼 단순하고 무조건적이지 않다.

이념논쟁은 경선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경쟁자에게 붉은 색을 입혀 반사이익을 보려는 색깔론적 시도는 역효과만 낸다고 한다.

자유로운 사상은 사회진보의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어떤 견해와 사상은 들판에서 다른 견해나 사상과 만나 맞붙어 싸우면서 정당성을 획득하거나 오류를 수정해 간다.

선거에 따른 ‘사상의 자유시장’을 앞에 두고, 유권자의 마음이 모처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가벼워지고 있다.

노풍(盧風)의 발원지는 많은 평균인이 지닌 변화에의 욕구이며, 그 욕구는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자신감에서 나올 것이다.

노풍은 3김(金) 정치와 지역정서, 색깔론을 무력화 시키는 것만으로도 획기적이고 희망적이다.

우리 국민도 마침내 ‘추상적 이념보다는 현실의 구체적 악’을 제거할 정치적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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