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년 4월17일 미국의 정치가 겸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이 작고했다. 향년 84세. 프랭클린은 매서추세츠주 보스턴 출신이지만 17세에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뒤로 평생을 펜실베이니아 사람으로 살았다.프랭클린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형이었던 ‘보편인(普遍人)’을 연상시킬 만큼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경영한 신문인이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 전신인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와 미국 철학협회를 창설한 교육자였으며, 전(全)식민지 체신장관 대리로서 미국 우편제도의 토대를 닦은 체신인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이 미국사에 남긴 가장 큰 흔적은 외교 활동과 관련돼 있다. 그는 처음에는 펜실베이니아를 대표해 영국이나 다른 식민지들과 협상을 벌였고, 뒤에는 아메리카 합중국 전체를 대표해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영국의 숙적(宿敵) 프랑스의 군사ㆍ재정적 도움 없이 미국의 독립은 쉽지 않았을 터인데, 프랭클린은 1776년 토머스 제퍼슨 등의 동료들과 독립선언을 완성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재정 원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 미국 독립전쟁을 마무리한 1783년의 파리 조약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다. 제퍼슨이 기초한 원안을 프랭클린이 가다듬은 미국 독립선언은 자연권 사상을 옹호한 뒤 영국 왕의 학정을 나열함으로써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해야 할 당위성을 천명했다.
프랭클린을 과학자로도 부르는 것은 주로 피뢰침 때문이다. 그가 발명한 피뢰침은 벼락에 의한 충격 전류를 대지로 안전하게 유도함으로써 낙뢰에 대한 오랜 공포에서 인류를 해방시켰다.
프랭클린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것은 날카로운 경구로 가득 찬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이다. 프랭클린의 필명은 리처드 손더스였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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