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제목은 들었지만 읽어보지는 못한 고전들이 많다.고전이 고전이 된 것은 당대의 문제들을 명쾌하게 분석해주었기 때문.고전의 날카로운 현실해석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주효하다.인문학계 소장파 학자와 연구자들이 고전을 쉽게 풀이함으로써 독자들이 지금 한국사회를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주≫
유능한 시험 감독관은 대개 교실 뒷편에 선다. 가끔 헛기침이나 발소리를 효과음으로 덧붙이면 효과는 훨씬 커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사는 학생들을 볼 수 있지만 학생들은 그를 볼 수 없다. 감히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이상 학생들은 시험 시간 내내 ‘바른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처럼 단순한 감시의 원리는 19세기 초 제레미 밴덤이 설계한 판옵티콘(원형감시장치)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왕 없는 권력’은 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발견했다면, 밴덤이 찾아낸 것은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밴덤이 구상한 것은 집단적 격리와 통제가 필요한 영역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원리였다. 그는 판옵티콘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부류든 감시되어야 할 사람들을 수용하는 사회 시설, 특히 감화원, 감옥, 공장, 작업장, 구빈원, 제작소, 정신병원, 검역소, 병원, 학교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 원리’. 사회 전반의 조직 원리였다는 점에서 판옵티콘은 밴덤식 유토피아였다.
판옵티콘은 빛과 시선을 교묘하게 배치한다. 밴덤의 계획은 중앙의 감시탑 주변에 독방들로 채워진 원형의 건물을 세우는 것이었다.
중앙의 감시탑에는 감시자 한 명을 배치하고 독방 안에는 광인이나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 등 누구든지 한 사람씩 감금한다. 중요한 것은 빛과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중앙의 감시자는 독방을 볼 수 있지만, 독방에 감금된 자는 결코 감시자를 볼 수 없다. 감금된 자는 빛에 노출되지만 감시자는 어둠 속에 숨는다.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각자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할 때 판옵티콘의 효과는 정점에 달한다. 언제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눈’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동료가 감시자다.” 이것이 푸코가 ‘감시와 처벌’(1975)에서 말하는 규율 권력의 작동 방식이다. 규율이 존재하는 어떤 집단에서도 시선의 권력은 작동한다.
군대와 학교, 직장 심지어는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안에는 늘 우리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있다.
‘자율’이 준법의 동의어로 쓰일 때, 그것은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결과에 가깝다. 가령 경찰 대신 교통법규 위반자를 감시하는 ‘파파라치’의 효과가 그것이다.
그들의 사진기는 경찰의 시선을 무한대로 복제한다. 제복을 걸치지 않은 감시자는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한다. 덕분에 운전자는 곳곳에서 감시자의 존재를 실감한다.
이 제도의 진정한 효과는 운전자들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자율’은 자발적 복종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감옥에 대한 책이 아니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한없이 촘촘한 권력의 시선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권력을 자유의 억압 정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푸코는 말한다. ‘보이지 않는 눈’은 개인들에게 일일이 번호를 부여하고 관찰하며 세심히 기록한다.
훈련과 평가가 뒤따르고 규준에 못 미치는 자에게는 처벌이 가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길들여진 신체는 개인과 집단의 생산적 능력을 증대시킨다.
대신 권력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뺀다. 자기 안에서 감시자의 눈빛을 느끼는 자의 복종은 체념을 동반한다.
신체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지만 ‘쓸모 없는’ 힘은 제거되는 것이다.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주어진 질서의 밖에서 종종 겪게 되는 당혹감을 생각해 보라.
혹은 명예퇴직한 은행원과 제대 군인이 맞닥뜨려야 할 무력감 따위들!
푸코는 낡은 문서 창고에서 자질구레한 삶의 조각들을 끄집어 내 권력의 격자 위에 펼쳐 놓는다.
권력은 사소한 것들을 통해 작동하며, 일상은 낱낱이 감시의 시선에 노출된다. 근대의 개인은 권력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그물코다.
그래서 권력의 그물망이라는 푸코의 비유는 섬뜩하다.
지나치게 비관적이거나 무기력한 결론인가? 그러나 저항은 이 책의 숨겨진 주제다.
들뢰즈의 표현처럼 ‘감시와 처벌’은 “전투의 흙먼지로 술렁인다.” 이 책이 돌연 “멀리서 들려오는 전투의 아우성”으로 끝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최태원(32)/ 수유연구실ㆍ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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