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영/대학강사. 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지만 스트레스는 전혀 없다.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어 결혼하지 않는 것 뿐이니까.
그렇다고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자와의 관계를 매우 즐긴다. 평생 누군가를 좋아해 왔는데, 결혼한다고 ‘땡’할까. 차라리 그 감정만 즐기고 살고 싶다.
“그런데 이 여자 참 맹랑하네.”
연희/조명디자이너. 한 달에 열번도 넘게 선을 봤다. 부끄러울 것은 없다. 왜 대강 결혼하고 나중에 후회를 하니? 난 조건에만 맞게 결혼하면 잘 살 것이다.
요조숙녀로의 변신도 자유자재. 난 자신 있다.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
“그런데 이 남자 볼수록 끌리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감독 유 하)는 소개팅으로 만난 대학강사인 준영(감우성)과 연희(엄청화)의 이상한 사랑얘기다.
연희는 준영의 직업이, 준영은 연희의 계산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이 물건너간 두 사람, “만나서 반가웠다”는 상투적인 인사를 남기고 헤어지는 게 순리다. 그러나 둘은 좀 다르다.
“택시비보다 여관비가 싸겠다”는 준영의 말에 연희는 “어차피 곯아 떨어질텐데”라고 속보이는 말을 보탠 후 여관으로 직행한다. 물론 둘은 곧바로 곯아 떨어지지 않았다.
연희는 맞선을 본 후 의사와 결혼하고 준영은 여자 친구처럼 그녀의 결혼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둘은 섹스를 한다는 것이다.
‘해피 엔딩’에서 전도연이 칫솔을 사다 놓은 정부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은 불륜의 현장증명을 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희는 물건을 사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즐긴다.
사진첩 속의 둘은 맞선보고,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와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부부이다.
결혼한 연희는 준영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일종의 시간제 동거를 하지만 그건 ‘불륜’이 아니라 “남보다 조금 더 바쁘게 사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결혼한 사람처럼 싸우고 말았다. 결혼하기를 싫어하는 남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와 관계를 계속함으로써 결혼을 모독했다.
여자는 결혼에서 여유를, 남자친구에게서 쾌락을 얻음으로써 결혼의 신성성을 깼다. 하지만 그 둘이 별다른 관계를 구축한 것도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현실 연애에서 그렇듯, 영화 속에서도 남자가 여자보다 덜 영악하다는 것. 남편의 전화에 신경줄이 곤두서는 것은 남자다.
결국, ‘결혼은 (하고 보면) 미친 짓이다’라는 명제를 뒤엎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행위 역시 ‘미친 짓’으로 수렴된다. 결혼의 긍정만큼이나 부정도 미친 짓이라는 얘기다.
가수이자 배우인 엄정화, 데뷔 11년째인 감우성. 배우로서는 기대치가 크지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 특히 감우성의 냉소적인 연기는 높은 점수를 얻을 만하다.
빨래를 하던 두 사람이 비누거품으로 장난을 치는 상투적이고 낯간지러운 애정신이 눈에 거슬리지만 아기자기한 화면에 군더더기 없는 구성이 경쾌하다.
눈요기로 전락할 만한 소재지만 이만교의 원작을 살린 대사와 캐릭터 설정이 상당한 상업성과 무시 못할 완성도를 보장하고 있다. 26일 개봉. 18세 이상.
박은주기자
jupe@hk.co.kr
■유하감독 / "결혼제도 뒤집어보고 싶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뒤집어서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사회에서 결혼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 눈에 보이는 조건을 따지고, 그 조건에 맞춰서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정해 버리고…”
유하(39)감독의 제작 의도는 그의 오랜 창작 작업과 맞물린다. 시인인 그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천일馬(마)화’ 등 시집에서 ‘위반과 전복’을 실험했다.
그리고 1992년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로 메가폰을 잡은 후 10년 만에 다시 영화에 뛰어들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던 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제도에 대한 뒤집기 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여자는 애인에게 집을 마련해 주고, 결혼생활 틈틈이 애인을 돌봐준다.
감독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결혼과 외도를 넘나드는 여자를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반발로 본다.
“관객들이 지금껏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에 대해 한번쯤 의구심을 가지도록 문제를 던져 놓았다.”
유감독은 이만교의 소설을 직접 시나리오로 옮기면서 남자 주인공을 복잡하게 옭아맸던 ‘가족’이라는 가지를 쳐냈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결혼 따로, 연애 따로’라고 생각하는 여자의 미묘한 심리 변화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그는 “영화는 원작소설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번엔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는다”고 했다.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의 착잡한 실패를 염두에 둔 얘기다. 그동안 자신도 많이 변했다고 한다.
“시는 내가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라면, 영화는 정말 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 영화를 할 때는 영화에만 전력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