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15일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6척과 상선 2척이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영국군은 거의 두 해가 지난 뒤인 1887년 2월27일에야 그 곳에서 철수했다. 거문도에 영국 국기가 휘날리던 그 시절에 영국인들은 이 섬을 해밀턴항(港)이라고 불렀다.거문도는 여수 앞바다의 도서(島嶼)로 서도(西島)ㆍ동도(東島)ㆍ고도(古島) 세 섬으로 이뤄져 있다. 본래 삼도(三島)라고 불렸으나, 영국군 점령 당시 중재를 위해 들른 청(淸)의 군인 정여창(丁汝昌)이 이 곳에 뛰어난 문장가가 많은 데 놀라 ‘거문’으로 개칭하자고 조선 조정에 건의해 지금의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전한다.
거문도 사건은 당시 최강의 해군국 영국과 최강의 육군국 러시아 사이에 세계적 규모로 치열하게 벌어지던 세력 다툼 와중에서 불거져 나왔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남진 정책을 펼치던 제정 러시아는 1860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점한 이후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함경도의 영흥만(永興灣)과 제주도,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영흥만이 일차적 표적이었다.
낌새를 알아챈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1882년 한영 수호교섭이 시작될 무렵부터 거문도에 관심을 보이며 이 섬의 조차(租借)를 제의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일촉즉발 상태로 대립하고 있던 터라 영국은 조선이 러시아 세력권 안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조선 조정에 친러파가 득세하자 영국은 위기감을 느끼고 조선 영토의 선점을 강행했다. 영국이 거문도에서 물러난 것은 청(淸) 이홍장(李鴻章)의 중재로 조선 영토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러시아로부터 받아내고 나서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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