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내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대표직을 8년간 맡아 온 김동완(金東完ㆍ60) 총무 목사가 18일 총무직에서 물러나 평범한 목회자로 돌아온다.김 총무는 1970, 80년대 노동ㆍ빈민ㆍ민주화 운동을 꾸준히 펼치고 90년대 들어서는 북한 교회와 지속적인 교류를 맺어오면서 교계 내에서 통일운동에 앞장서 온 대표적인 인사로 꼽힌다.
이임식을 1주일여 앞둔 10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내 KNCC 사무실에서 김 총무를 만났다.
_8년여간 총무직을 맡다 떠나시니 감회가 특별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90년대 들어 남북 교회의 하나됨을 이룩하기 위해 북한 교회의 초청으로 5번이나 북한에 다녀온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97년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초청으로 받아 평양 봉수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이전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한국의 권호경 목사가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목회자로서 북한 교회의 공식 초청을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 교회의 일치는 궁극적으로 남북 교회의 하나됨을 지향한다고 봅니다.”
_최근 교계 내에서 북한 교회를 돕는 KNCC의 활동을 ‘대북 퍼붓기 활동’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는데요.
“한국의 교인들이 풍족한 생활 속에 사는 축복을 받는 것은 ‘이웃과 나누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한에 불우한 이웃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녘의 굶어 죽어가고 있는 동포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12장 20절에 보면 ‘이웃이 배고파 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라’고 나옵니다. 6ㆍ25 전쟁에서 비롯된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지금 당장은 한국 교회가 북한 교회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_총무께서는 교계에서 대표적인 ‘마당발’로 통한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의 주요 사건 중에 내 손을 안 거쳐 간 것이 없다고 할 정돕니다. 70년대부터 달동네, 공장촌 등지에서 빈민 사목 활동을 펼치고 85년부터 KNCC 인권위의 사무국장을 지내면서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민주화 운동으로 해직된 교수나 기자 치고 KNCC 인권위의 후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뭅니다. 해직 교수에게 여비를 후원해주면서까지 지방 강연에 내보내는가 하면 당시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많은 수배자들이 평화와 안식을 찾아 KNCC로 찾아오곤 했지요.”
_80년대 KNCC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 있었던 일화들이 많았을텐데요.
“6ㆍ29 선언을 불러온 87년의 6ㆍ10 항쟁에서도 KNCC는 전국적인 교회의 저항 움직임에 불씨를 당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박종철 고문 사건도 박종철의 부검의였던 박근상씨로부터 고문사 소식을 전해들은 한 외신기자가 KNCC에 제보하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지요. 훗날 박근상씨는 제1회 KNCC인권상 수상자가 됐습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도 가장 먼저 KNCC에 제보가 들어왔고 김근태 민주당 최고위원의 고문사건, 이태복 복지부 장관의 고문사건 폭로도 KNCC가 했습니다.”
_KNCC 인권위 시절 이전부터 빈민, 노동, 인권 운동에 오랫동안 간여한 진보적 목회자로 활동해오셨는데요.
“감리교신학대 재학 시절인 70년 11월 13일 청계피복노조의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나자 부흥사의 꿈을 접고 이를 사회 문제로 부각시키는 데 앞장서면서 사회구원을 위한 교회 운동의 전면에 나섰지요. 유신 때인 74년 1월에는 KNCC 사무실에서 유신헌법반대 기도회를 가졌다가 긴급조치 위반 1호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고 1년 여 뒤 특별사면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10여 차례 구류와 수십 차례의 연행 조사로 받아 교계 내에서는 강성 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을 참 모질게 산 것 같습니다.”
_KNCC 총무로 활동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94년 총무로 취임하는 과정에서 ‘김영삼 맨’이라는 오해를 사고, KNCC의 주요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반발로 반쪽짜리 대표자로 시작했던 것이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94년 6월 철도파업으로 350명의 노동자가 KNCC로 도망 온 적이 있는데, 김영삼씨는 명동성당과 달리 KNCC는 ‘성역이 아니다’며 모두 연행해 갔습니다. 더구나 정부측이 제가 마치 강제 연행을 허락한 것처럼 언론에 흘리는 바람에 난처했던 적도 있습니다. 개신교의 성역이 깨진데다 개인적으로는 누명까지 뒤집어 써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지요. 92년 대선 때 김영삼 전 대통령측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괘씸죄가 적용됐기 때문입니다. 취임 이후 2년여 만에 예장통합측을 다시 KNCC로 끌어 들여 진보 교단의 화해와 일치를 이끌어낸 것은 지금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_그동안 개신교계 다른 한 축이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합니까.
“한기총은 노태우 정권 시절 정부가 주도적으로 조직한 기구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정부를 비판한다고 감옥을 가고, 정부측 입장을 돕는다고 덕 볼 일이 뭐가 있습니까. 진보와 보수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있는 지금이 바로 한국 교회가 하나 될 절호의 기회라고 봅니다. 90년대 KNCC가 북한 교회와 교류를 추진한 것처럼 한기총도 북한 난민을 중심으로 활발한 구호사업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름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_앞으로 KNCC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입니까.
“북한 교회와의 화해운동, 국내의 해외 노동자ㆍ 장애인ㆍ북한 난민 등 소외된 자에 대한 사랑, 교단의 통합 운동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종교간의 화해도 중요합니다. 저는 99년 이후 매년 4월 초파일이면 조계사에 참배하러 갑니다. 개신교계에서는 ‘미친 놈’ 소리를 들을 행동이지만, 종교과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_앞으로 거취는 결정하셨습니까.
“당분간은 시골의 작은 교회를 돌아 다니며 그 동안 듣고 배워왔던 북한 교회 얘기도 들려주고 설교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통일문제는 정쟁이 대상이 아닙니다. 정당이 집권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통일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평화의 성역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4년씩 2번 연이어 KNCC 총무 목사직을 지내고 30여년간 사회운동의 한복판에 있다가 이제 일반 교인 곁으로 돌아가는 김 총무는 인터뷰 말미에서도 재차 교회의 통일과 화해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약력
▦ 강원 강릉 출생
▦ 1965년 인하대 졸업
▦ 1972년 감리교신학대 졸업
▦ 1983~85 전태일기념사업회 초대회장
▦ 1985~89 KNCC 인권위 사무국장
▦ 1989~1994 서울형제교회 담임목사
▦ 1994~2002 KNCC 총무목사
▦ 현재 동북아식량포럼 공동대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중앙위원
▦ 문화관광부장관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평화상(2000) 국민훈장 동백장(2001)
김영화기자
yaaho@hk.co.kr
■KNCC는 어떤 곳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올해로 78주년을 맞는 개신교계내 대표적 진보교단협의체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구세군대한본영,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정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등 8개 교단이 가맹돼 있다.
1924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립총회가 KNCC의 전신.
6ㆍ25 이후 세계교회의 협력으로 교회와 사회 재건을 도왔고, 60~80년대 빈민, 농민, 노동자 등 현장 선교 그리고 인권운동과 민주화를 위해 군부독재에 맞서 왔다.
68년 3선개헌을 반대하는 교회의 성명을 발표하고, 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당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박형규, 권호경 목사 등이 구속되기도 했다.
88년에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채택, 재야 및 학생 운동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93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인간띠잇기대회, 5ㆍ18특별법 제정촉구 등 다양한 사역을 벌였다.
KNCC는 22일 김동완 목사 후임으로 내정된 KNCC 부총무이자 에큐메니컬 선교훈련원 원장인 백도웅 목사의 총무목사 취임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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